
[특별기고] 최근 한 선배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나라 위상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환율 변동에 따라 순위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한국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10위권 초중반에 자리하고 있다.
1인당 GDP만 보더라도 이미 일본을 앞선 상태다. 대만이 반도체 산업 호조로 우리보다 앞서는 지표도 있지만, 적어도 한국은 더 이상 ‘경제력이 부족한 국가’로 분류될 수 없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제 한국을 못 사는 나라로 보지 않는다. 경제 규모와 산업 경쟁력, 보건의료 인프라를 고려하면 한국은 명백히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국가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우리나라 예방접종 정책은 과연 그 경제 수준에 걸맞은 위치에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영국이나 미국 수준까지 단번에 따라가자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와 경제 규모나 보건의료 수준이 비슷한 일본, 대만과 견줄 수 있는 수준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OECD 국가 중 우리와 비슷한 경제력을 가진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도 크게 뒤처지지 않는 예방접종 전략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여러 감염병 예방접종에서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낮은 정책적 결정을 반복하고 있어 안타깝다.
비용효과성 근거 충분한데도 멈춰선 ‘예방접종 정책’
특히 고령층 예방접종에서 비용효과성에 대한 판단을 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백신의 비용효과 분석은 단순히 “접종 비용이 비싸다, 싸다”를 따지는 절차가 아니다.
지금 일정한 재정을 투입해 예방접종을 시행했을 때 향후 감염병 발생과 입원, 중증화, 사망, 후유증 등으로 발생할 의료비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예방접종은 당장의 지출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건강보험 재정과 국가 재정을 아끼는 투자에 가깝다.
영국은 이 부분에 매우 민감하다. 공공의료 체계 안에서 세금으로 백신을 지원하더라도, 환자 발생으로 인한 사회적·의료적 비용보다 접종 비용이 더 적게 든다는 판단이 나오면 빠르게 국가예방접종 프로그램에 반영한다.
실제로 대상포진 백신인 싱그릭스는 2023년 영국 국가예방접종 프로그램에 포함됐고, RSV 백신도 2024년 국가예방접종 체계에 들어갔다.
이들 백신은 결코 저렴한 백신이 아니다. 국내 소매가격 기준으로 보면 싱그릭스는 2회 접종에 약 50만원, RSV 백신도 약 30만원 수준이다.
그럼에도 영국은 해당 백신을 접종했을 때 10년, 20년 뒤 환자 발생 감소를 통해 국가 전체 의료비를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비용이 비싸 보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재정을 절감하는 선택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료와 역량을 갖추고 있다. 과거에 비해 백신 관련 질병 부담, 예방효과, 경제성 평가 자료가 훨씬 축적됐다.
물론 일부 자료가 부족하거나 빈틈이 있는 영역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국가 차원의 비용효과 분석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 있다.
실제로 인플루엔자 고면역성 백신, 폐렴구균 단백결합백신 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비용효과성이 확인된 바 있다. 일부 자료는 질병관리청이 발주한 연구에서도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자료 부족이 아니다. 필요한 자료가 있는데도 정책 결정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다.
‘당장 돈 든다’ 논리에 갇힌 재정 결정 구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질병관리청과 보건복지부, 전문가들이 자료를 만들고 근거를 제시해도 결국 기획재정부의 재정 판단을 넘어야 한다. 기재부가 결정하지 않으면 국회를 설득해야 하는 구조가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이미 수년째 같은 설명을 되풀이하고 있다. “비용효과성이 있다”, “장기적으로 건강보험 재정을 절감할 수 있다”, “고령층 질병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자료를 제시해도, 돌아오는 답은 대체로 “당장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매우 답답하다. 지금 당장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예방접종 도입을 미루는 것은 결국 미래 더 큰 의료비 부담을 방치하는 일이다.
예방접종은 단순 복지 지출이 아니다.
건강한 노년을 유지하게 하고, 입원과 중증화를 줄이며, 의료체계 부담을 낮추는 보건의료 투자다. 10년, 20년 뒤 절감될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지금의 투입은 일종의 저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작거나 GDP 수준이 낮은 국가에서도 이미 시행 중인 예방접종을 한국은 계속 미루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한국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예방접종 정책은 비교적 잘 추진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경제력이 충분히 커졌음에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필요한 예방접종 도입을 늦추고 있다. 물론 국가 재정에는 늘 쓸 곳이 많다. 그러나 질병을 예방하고 미래 의료비를 줄이는 일까지 계속 후순위로 밀려야 하는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전문가들 입장에서는 자괴감도 든다. 여러 전문가들이 비용효과성 자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연구자들이 오랜 시간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고 국가 예방접종 정책 근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어렵게 만든 자료가 정책 결정 단계에 올라가면 “자료는 좋고 필요성도 인정하지만 돈은 줄 수 없다”는 식의 상황이 반복된다. 전문가들이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게 되는 이유다.
이제는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 예방접종을 재정 지출로만 보지 말고 국가 경제와 건강보험 재정을 지키는 투자로 봐야 한다. 만약 현재의 조세 기반 의사결정 구조가 비용효과성에 둔감하다면, 건강보험 재정을 활용하는 방식까지 포함해 제도 개편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건강보험 재정으로 예방접종을 시행하면, 접종으로 줄어드는 의료비 절감 효과 역시 건강보험 재정으로 돌아온다. 지출과 절감의 주체가 같아지는 만큼 비용효과성에 더 민감한 구조가 될 수 있다.
정책 결정 체계가 합리적 근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체계 자체를 다시 봐야 한다. 지금은 단순히 개별 백신을 도입할지 말지를 넘어, 우리나라 예방접종 정책 결정 구조를 원점에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정밀하고 지속적인 데이터 생산체계도 필요하다. 백신 예방 효과, 안전성, 질병 부담, 의료비 절감 효과를 안정적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비용효과 평가가 가능하다.
전문가와 질병관리청이 매번 어렵게 자료를 만들어 정책 당국을 설득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신 관련 데이터가 매년 체계적으로 축적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예방접종 정책이 정기적으로 평가·개선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다. 그렇다면 예방접종 정책도 그에 맞는 수준으로 올라서야 한다. 고령층 감염병 예방은 선택적 복지가 아니라 미래 의료비와 국민 건강을 지키는 핵심 전략이다.
이제는 ‘당장 돈이 든다’는 이유로 미루기보다는 지금 투자하지 않으면 더 큰 비용을 치른다는 관점에서 국가 예방접종 정책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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