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斷食) 일보 직전
2008.08.04 08:06 댓글쓰기
얼마 전 해외 학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탄 비행기의 기내 TV뉴스에 어떤 사람이 손가락 끝을 베고 혈서를 쓰는 장면이 나왔다. 아무리 중대한 사안이라도 자기 신체를 손상시킬 수 있을까 궁금하면서도, 어쨌건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쉽게 단식, 자해 등의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오래 전 일이지만 나도 단식 시위를 할뻔한 위기가 있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억지로 단식에 동참해야 할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1999년 이런 저런 연유로 우리 대학의 교수협의회장이 되었다. 교수협의회장은 그리 할 일이 많은 자리가 아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갑작스레 병원에서 가장 바쁜 감투가 되어 버렸다. 의약분업을 반대하는 의사들의 전국적인 파업이 터졌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파업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무용담같이 즐겁게 회상하기도 하지만 당시는 상황이 꽤 심각했다.

대학병원들이 한 동안 완전 마비돼 환자를 보지 못 했고 의사들도 분을 참지 못해 대부분 파업에 동참하는 분위기였다. 병원 내에서는 교수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하여 전체 교수회의가 수시로 열렸고, 병원 밖에서는 전국 의과대학 교수협의회장(전교협)들의 모임이 정례화되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전교협 모임이 열리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TV 카메라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병원 전체 교수회의를 하느라 전교협 모임에 좀 늦게 참석하였다. 살금살금 뒷자리에 가서 앉는데 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의과대학 학생들이 단식을 주장하는 마당에 스승인 교수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제자들보다 먼저 단식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교수들 대표인 교수협의회장들이 앞장서자는 것이었다. 누구 하나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분위기가 심각하고 진지했다.

전국에서 모인 40여 명의 교수협의회장들 가운데 유독 3~4명 정도가 단식에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이분들 모두 평소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몸매가 넉넉한 분들이었다. 단식을 투표로 결정할 지 아니면 거수로 결정할 지 사회를 보는 전교협 대표가 의견을 물었다. 단식을 전체 의견으로 정하여 가급적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동참하자는 것이었다.

‘어어 이래서는 안 되는데 누군가 나서서 반대하겠지’ 기대했지만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대로 단식이 결정되면 나는 어떻게 하지? 단식을 주장하는 교수들이야 다이어트 겸해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기분으로 단식을 하겠지만… 눈치 보이게 나 혼자 살짝 빠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들 따라 단식을 억지로 하는 것도 싫고’ 짧은 시간에도 여러 가지 단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아 단식은 기정 사실화되었고 이젠 구체적인 방법을 토론하는 순서로 돌입하는 순간 엉겁결에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섰다.

“단식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인도의 간디입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단식을 했습니다. 여기 모인 분들 가운데 의약분업 때문에 목숨을 걸 분 있습니까? 목숨을 건 단식이 아니라면, 그만큼 비장하지 않다면 우리가 하려는 단식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쇼 아닙니까?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교수들이 너무 감정에 치우친 것 같습니다. 특히 보여주기 위한 단식은 치졸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왕에 보여주기 위한 거라면 삭발도 좋은 방법 같은데 삭발은 왜 안 합니까?”

급한 놈이 샘 판다고 말이 청산유수같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freeze 그 자체였다. 나도 내 발언이 회의장을 그렇게 얼어붙게 할 줄은 몰랐다. 한 순간의 정적이 흐른 후 단식을 주장하던 교수들이 일어나 나를 강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다 결정된 단식을 뒤엎는 내 발언을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냥 묵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의약분업 때문에 목숨을 걸 의사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발언 내용 보다는 “치졸”이란 단어를 문제 삼아 나를 비난하였다. 거센 비난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잇달아 비난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시 일어나 추가 발언을 했다.

“제 발언 가운데 치졸이라는 단어가 여러 선생님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그 단어는 취소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단식에 동참을 한다면 조상님께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식을 주장하는 분들의 입장을 좀 살려주려는 추가 발언 의도와는 달리 입에서는 조상님까지 들먹이는 더 강한 발언이 나와 버렸다. 어쨌건 단식을 안 하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어져 갑론을박 끝에 결국 없던 일로 되고 말았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대학 교수협의회장이 살짝 귓속말을 한다. “답답하던 차에 나서서 말씀 참 잘 하셨습니다. 좀 전에 단식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당황했었거든요. 어떻게 해야 하나 저도 내심 고민했었는데 안 하게 돼서 다행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 분위기는 살벌했다. 마지막 전교협 회의에 갈 때는 혹시 경찰이 덮쳐 교수협의회장들을 다 연행할 수도 있으니 장소는 비밀로 하라는 연락도 받았다. 비밀회의 장소로 가면서 법조계에 있는 친지에게 연락하여 혹시 내가 연행되면 행방을 수소문하여 가족들 걱정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던 기억도 난다. 이 날 회의를 하던 도중 의사들의 요구를 대거 수용한다는 대통령 담화가 TV로 발표되면서 파업 사태는 사실상 종료되었다.

실제 죽기 살기로 단식을 했던 유명 정치인의 단식에 대한 결론은 단순 명료하다. “단식하면 죽는데이.” 직접 경험에서 나온 명언이다. 목숨을 걸 절박한 사안이 아니라면 단식 같은 거 꿈도 꾸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춘성 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 교수 기자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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