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2008.10.10 02:13 댓글쓰기
지난 여름, 일본 북해도 대학에서 학회를 마치고 휴양지 토야(洞爺)로 가게 되었다. JR을 타고 170Km 거리를 두 시간 동안 가는데 놀랍게도 만원(滿員) 기차 안에서 휴대폰을 사용하거나 큰 목소리로 대화를 하여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나라 고속버스나 전철, 기차를 타면 휴대폰 공해가 너무 심해 가급적 대중 교통수단을 피하게 된다. 엘리베이터에서도 다른 사람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거나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새치기 주행, 고속도로 갓길 주행은 다반사고, 광우병 데모 한다고 광화문 대로를 불법 점거하고 폭력을 휘둘러댄다. 한 마디로 후진적인 행태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일본은 선진국 가운데서도 가장 질서의식이 앞선 나라이다. 이런 일본의 강점(强點)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세계 어느 나라건 지폐의 초상화 인물은 그 나라를 대표하면서 동시에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특히 고액권의 인물일수록 그렇다. 일본의 가장 고액권인 1만 엔(円)권의 인물, 즉 일본을 상징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1984년 선정되었던 다른 지폐의 인물들은 2004년 모두 교체되었으나 1만 엔권의 이 인물은 건재하다. 바로 근대 계몽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처음 들어본 분도 많을 것이다. 우리의 세종대왕에 필적하는 이 사람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아직도 우리가 일본을 잘 모른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는 후쿠자와에 ‘쨉’도 안 되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후쿠자와는 일본의 국부(國父)로 인식되는 인물이다.

후쿠자와는 1835년 오사카 근처 ‘나까즈’번(中津藩)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에 찌들려 살던 그는 20세에 나가사키로 가서 화란어와 난학(蘭學)을 배우기 시작한다. 3년 간 침식을 잊고 공부하여 그 실력이 널리 알려지면서 24세에 에도(현재의 동경)의 나까즈번 영주 저택의 한 모퉁이에서 ‘게이오 의숙’을 열고 화란어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훗날 이 의숙은 일본 최고 사립대학인 ‘게이오(慶應) 대학’으로 발전한다.

후쿠자와는 어느 날 요코하마에 갔다가 화란어와 난학의 시대는 저물고 영어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발견한다. 그때부터 독학으로 영어 공부에 매진하여 경제학 원론을 영어로 강의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자신을 연마하는 한편, 장차 새 일본을 담당할 인재 양성을 위하여 서구 열강들의 앞선 문명에 관심을 갖는다. 마침 서구 문명국들을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된다. 1860년 미국 방문 사절단의 수행원을 시작으로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기 전 7년 동안 미국 2회, 유럽을 1회 시찰하게 된 것이다. 이 여행은 ‘서양사정(西洋事情)’이라는 10권으로 된 저서로 일본 국민들에게 소개된다.

그의 여러 저서 가운데 일본 국민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서는 1872년 처음 발간된 저 유명한 ‘학문의 권면’이다(‘학문의 권유’라고도 번역된다). 그는 이 책의 첫 장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로 시작하면서 민본, 인권, 평등의 사상과 함께 개인의 존엄성, 법치국가 개념 등을 일본인에게 소개한다. 봉건적 인습에 젖어있던 당시 일본인들에게 이 책은 하늘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4년에 걸쳐 총 17편으로 출판된 ’학문의 권면’은 메이지 시대 민심을 근본부터 흔들어놓았다. 그는 좋은 국민 위에 좋은 정부가 생기고, 좋은 국민은 독서로부터 온다고 학문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학문의 권면’은 일본 인구가 3,500만 명이었던 당시 무려 370만부가 팔릴 정도로 초(超) 베스트 셀러였다. 거의 모든 일본인들이 이 책으로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일본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국민이 된 것은 후쿠자와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하철의 무가지(無價紙)나 읽는 우리 국민들과 비교된다.

구한말(舊韓末)과 일제 치하 우리의 많은 지식인들이 후쿠자와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물론이요, 일제 치하의 이광수, 최남선 등도 후쿠자와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 유길준의 ‘서유견문’,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모두 후쿠자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 만사가 그렇듯이 후쿠자와에게 좋은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큰 과오가 있었다. 일제 군국주의의 침략에 이론적 발판을 제공하였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일본에 시달린 인접 나라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그는 달갑지 않은 인물이다. 초기의 후쿠자와는 민권을 주창하였으나 1882년 언론사업에 뛰어들어 ‘지지신보(時事新報)’라는 영향력 있는 신문을 통하여 여론을 주도하면서 국익에 앞장서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부국강병과 ‘탈아 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장하여 일본이 군국, 패권주의로 나아가는 이론을 제공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일 발발하였을 때 군비헌납운동을 적극 전개할 정도로 일본의 침략정책을 옹호하였다.

구한말(舊韓末) 우리가 쇄국과 정쟁(政爭)으로 지새는 동안 후쿠자와는 교육과 저술활동을 통하여 일본 국민을 계몽하였다. 일본이 동양 3국 가운데 가장 먼저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후쿠자와와 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후쿠자와를 ‘일본에 복을 주기 위해 하늘이 내린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 후쿠자와가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겸허했던 생활태도 때문이다. 탁월한 식견과 훌륭한 업적으로 여러 차례 높은 관직을 제의 받았으나 모두 고사했다. 포상, 학위, 훈장, 작위 등의 세속적인 영예를 모두 거절하고 평민의 신분으로 민중과 더불어 사는 것을 평생 낙으로 삼았다.

문화심리학자인 명지대 김정운 교수는 최근 발간된 ‘일본 열광’이라는 책에서 일본 영화 ‘실락원’, ‘사랑의 유형지’, ‘철도원’의 주인공들인 일본 중년남자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고 있다.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김 교수에 따르면, ‘슬픈 한국 남자는 당구장으로 가고, 슬픈 일본 남자는 기차를 탄다’고 한다), 불륜도 하고, 자살도 하는 눈빛 촉촉한 주인공들의 행동은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도망침과 동시에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되는데, 그 아버지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것이다.

후쿠자와는 일본의 아버지이다. 그가 일본인들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를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학문의 권면’에서 후쿠자와는 특히 ‘분수(分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분수를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일본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귀가 따갑게 교육받는다. 이런 교육은 후쿠자와의 가르침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TV만 켜면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요, ‘무한도전’류 프로의 개그맨들은 청소년들의 정서 교육을 담당한 국민 연예인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전교조, 비(非)전교조 따져가면서, 자기 편은 어떤 일을 해도 옳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미워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 질서와 권위를 무시하고 잘못된 것은 다 ‘남의 탓’이라고 정죄하는 교육도 받는다.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공공장소에서 초등학생들이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집 안방처럼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워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 서구(西歐) 사람들이 가장 매력을 느끼는 나라, 이런 일본을 우리는 우습게 안다. 전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본을 우습게 여긴다고 일본을 이기는 것은 아니다. 먼저 그들을 잘 알고, 그들의 장점(長點)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과연 우리가 그들의 강점, 약점,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이춘성 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 교수 기자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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