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만남, 인연에 대한 두려움 떨친다
2009.01.18 13:29 댓글쓰기
그저 그런 수많은 날들과 또 그렇게 많은 만남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때로는 그 속에서, 범상치만은 않은 만남들과 마주치게 될 때면 우리는 흔히 ‘인연’이야 하는 한마디로 편하게 넘어가곤 한다. ‘인연’이란 것이 뭔지는 잘 몰라도.

길지 않은 의사 생활 동안 많은 환자분들을 만나보았다. 매일 같은 진료실에서 매일 같은 질문을 해 대면서. 이제는 익숙해져 어지간하면 별다른 감흥조차 없을 만도 한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고마운 분도, 미운 분도, 또 때로는 나를 기쁘게, 슬프게, 화나게도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마도 익숙해지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애써 태연해지려는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 정도 노력으로 편히 지낼 수 있는 분들만 만나게 되기를…. 그것만으로는 힘들어서 기어코 ‘인연’을 떠올리게 하는 분들은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바람이지만 또한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막 둘째 아기를 순산하고 입원해 있던 그녀가 응급실로 오게 된 것은 피를 토해서였다. 삼십대 건강했던 그녀의 병명은 위암! 불안하고 겁에 질린 그녀와 막막해 하는 남편의 눈빛을 보면서 어줍잖은 과장까지 섞어가며 그저 일단은 안심하도록 애쓰긴 했으나 막상 별 무소용이었던 것 같긴 하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그렇다. 의사라곤 하지만 생면부지의 낯선 사내가 호언장담하는 것이 뭐 그리 믿음직스러웠을까. 그럼에도 그 말미, 어렴풋하나마 어색한 미소를 보여주었던 것은 아마도 그렇게라도 희망을 잡고 싶었던 그들의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일 년이 넘게 그녀의 치료 경과를 살펴보면서 수술 후에는 통증이 얼마나 심할까 걱정하였고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는 구역질이나 구토는 얼마나 심한지, 식사는 제대로 하는지 머리카락은 얼마나 많이 빠졌는지 걱정하였으며 백혈구가 감소하여 치료 일정이 늦어지기라도 하면 함께 속상해 했었다.

다행히도 큰 탈 없이 무난히 치료가 진행되어 가던 어느 날, 외래에서 마주 앉은 그녀의 얼굴이 영 수척하여 상태가 유난히 안 좋아 보이길래 또 그 예의 질문을 해 대었다. “구역질이 심하셨어요?”, “식사를 제대로 못했어요?” 이도 저도 아니라는 그녀, 결국 알게 된 사실은 비슷한 연배에 비슷한 시기에 위암이 발견되어 수술 하게 된 그녀의 친구가 수술 후 척추 뼈로의 암전이가 발견되었음을 알고는 심하게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이후 아무리 애써 봐도 그녀의 얼굴은 이전과 같이 돌아오지는 못했다. 심지어 항암치료가 모두 끝나고 나서조차도.

무던히도 둔했던 나는 그제서야 문득 깨닫게 되었다. 통증이 심한 것은, 구역질이 심한 것은, 그리고 식사를 못하는 것은 그녀의 의지만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던,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 양 “아프지는 않아요?”, “구역질은 심하지 않아요?” 하고 열 번은 넘게 물어봤던 그 질문들이 실제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는 것을.

그리곤 가슴을 쓸어 내렸다. 정말 다행히도, 비록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난 그녀와 남편에게 또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녀가 무척 하고 싶은 말인 듯싶어 아무 생각 없이 들어 주었었던 많은 얘기들을 통해 그녀의 어머니 또한 중한 병으로 치료 받고 있는데 마음 놓고 뵐 수도 없어서 속상하다는 점, 그들의 첫 애가 내 애와 나이가 같다는 것, 그 애기를 치료 때문에 언니에게 맡겨놓아야 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점, 그리고 암 재발에 대한 두려움, 그 외 그녀가 힘들었던 많은 점들을 알게 되었고 나는 또 자연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곤 했었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이 진정으로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중요한 것이었음을 그 때는 왜 몰랐을까?

항암치료가 끝난 지 육 개월 여, 다행히 그녀는 재발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하지만 그들과 나와의 인연이 여전히 아름답게 유지되는 것은 치료의 결과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들어주고, 해 주었던 그 얘기들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앞으로 또 많은 환자분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조금은 인연을 맺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려 한다. 비록 내 능력에 의해서는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한 번의 인연으로 받게 된 격려 덕분이다. 더 믿음직한 의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환자분들에게나 나 스스로에게나.
정성원 교수 동서신의학병원 소화기센터 기자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관련기사
댓글 0
답변 글쓰기
0 / 2000
메디라이프 + More
e-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