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와 정신건강'
조정 차장(SBS 보도국)
2012.10.19 12:22 댓글쓰기

지난  4월 방송과 신문을 뜨겁게 달궜던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주인공 오원춘.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항소했고 검찰은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구형했다. 오씨의 범행이 신호탄이 된 것일까?


올해 우리사회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범죄와 ‘묻지마’ 범죄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뒤집어 보면 강력 범죄 이후에 사회의 안전망은 조금씩 촘촘해진다. 오원춘 사건 이후 허술한 112신고 대응체계는 질타를 받았고 조금이나마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의 이름을 딴 법이 새로 만들어져 성범죄에 맞설 카드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사건을 취급하는 미디어의 가볍고 계산적인 시각은 국민 전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있다. 도하 언론들은 오원춘 사건을 다루면서 처음에는 정도를 걷는 듯 보였다. 허점투성이 치안 시스템을 신랄하게 비판해 조현오 경찰청장의 옷을 벗겼다.


하지만 이내 보도는 선정 경쟁으로 치달았다. 피해자의 시신이 어떻게 훼손됐는지, 내몽고 출신의 오원춘은 왜 인육에 집착했는지, 듣기에도 끔찍한 추측 기사들이 줄을 이었다. 물론 오씨가 인육을 노렸는지 여부는 법정에서도 다툼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언론의 까발리기식 보도는 청소년, 특히 여성들에게 견디기 힘든 불쾌감을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원춘 관련 경쟁적인 자극성 보도의 정점은 어느 종편 TV뉴스가 찍었다. 살해당하는 순간의 피해 여성 목소리를 재연한 것이다. 인간의 탈을 쓴 살인마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리는 여성의 처절한 목소리. 끝내 경찰이 피해 여성의 112 신고 음성을 공개하지 않자 뉴스제작자가 대역을 시켜 그 울부짖음을 흉내 낸 것이다.


방송에서 18년 동안 일한 필자도 채널을 돌리다 그 여성의 절규를 접했다. 소름이 돋았다. 저것이 절명하기 직전의 발버둥 치던 여성의 목소리구나, 저걸 어떻게 입수했지, 방송에 내보내도 되는 것인가? 직업적인 상상과 함께 그날, 그 어두운 방에서 피를 흘렸을 여성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화면 귀퉁이의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음성 재연’. 허탈함을 넘어 분노가 밀려왔다. 무엇을, 얼마나 더 자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저런 만행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이불에 둘러싸인 채 이웃 아저씨에게 납치돼 다리 밑에서 성폭행당하는 7살 여자아이의 모습을 대역배우를 써서 재연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흉악범의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게 정의인양 경쟁적으로 피의자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싣는다. 얼마 전 어느 주요일간지가 나주 성폭행범의 얼굴인 줄 착각하고 무고한 시민의 사진을 1면 톱에 실어 파문을 일으킨 사건은 미디어의 가벼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민의 정신건강을 해치는 미디어의 폐해는 이제 인터넷으로 확장되는 모양새다. 최근 검색엔진인 네이버로 이름난 NHN이 서울 롯데호텔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항간에 떠도는 검색 조작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한때 인기 검색어로 떠올랐던 ‘박근혜 콘돔’과 ‘안철수 룸살롱’의 검색결과를 보는 과정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인데 NHN측은 조작은 있을 수 없다고 해명했다.


여기서 짚고자 하는 것은 검색 시스템이 아니다. 광고와 직접 연관되는 조회수, 이른바 트래픽을 높이기 위해 온갖 낚시성 글과 선정적 기사가 판을 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최근 한국언론진흥재단이 개최한 토론회에서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포털은 법적,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개별 언론사에 게재하는 뉴스의 편집권을 넘기고, 언론사들은 손님을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 모으기 위해 자극적인 글을 올린다. 경악, 분노, 충격… 본문과는 상관도 없는 제목에 낚여 쓰레기 같은 기사를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직장인들, 자녀와 함께 보기에 낯 뜨거운 뉴스 때문에 저녁 기분을 망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언론인의 한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어릴 적 뉴스에서 무심코 접한 충격적인 뉴스는 범죄로 인한 그것만큼 선명한 트라우마를 뇌리에 새길 것이다. 미디어와 정신건강의 상관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심도 깊게 지속적으로 연구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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