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가죽구두(리베이트)와 새운동화(윤리경영)
이정환 기자
2014.12.03 09:29 댓글쓰기

[수첩]리베이트 약가인하 연동제를 비롯해 리베이트 쌍벌제, 약제급여 투아웃제, 약제비 환수, 제약계 C.P(윤리경영) 헌장 선포 등.
 
의약품 처방 관련 의사와 제약사 간 불법 금품거래를 막기 위한 정부와 제약계가 내놓은 규제들은 지속적으로 진화·발전해왔다.
 
의약품 선택권이 의사에게 있는 의료산업의 특수성을 반영해 이름만으로도 치명적인 제도들의 등장은 리베이트 근절에 적잖은 행정력이 소요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제약협회와 국내 제약사들이 스스로 나서 청정·윤리경영을 선포하며 자정작용에 온 힘을 다할 것을 연일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선고된 동아ST와 동영상 리베이트 연루의사 10인에 대한 2심 재판부 판결 내용은 지금까지의 리베이트 규제 정책의 허상과 비실효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법원은 동영상 강연의 저변에는 의약품 처방 향상 의도가 곳곳에 내포돼 있는 근거를 조목조목 공개해 1심이 결정한 유죄 판결을 유지했다.
 
표면적으로는 동영상 강의를 제작해 교육목적 활동에 따른 강연료를 지급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리베이트 모델을 개발해 정부 정책 위에 서려는 교묘한 전략을 세웠던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고등법원은 동아ST를 향해 "쌍벌제 이후 동영상 강의라는 노력으로 변화에 힘썼지만 결과적으로 불법 금품수수 관행 폐습을 타파치 못하고 기존 리베이트 거래를 재차 이어갔다"며 "1심이 부과한 3000만원 벌금은 과다하기보다는 되려 부족하다고 생각된다"고 판시했다.
 
동영상 강의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청정한 제약산업 환경 구축에 쓰였다기 보다는 새로운 리베이트 제공 모델을 창출하는데 급급한 수준에 그쳤는데도 동아ST는 과실을 반성하기 보다는 항소를 통해 벌금 줄이기에 나섰다는 지적이다.
 
의사들에 대해서도 고법은 "강연료와 강의편수가 맞지 않거나 강의 내용이 부실해 의사들은 미필적으로나마 강연료가 리베이트라는 것을 알고 받았을 것"이라며 "감형된 의사들은 앞으로 불법으로 오인될만한 행위를 원천 지양하라"고 판시했다.
 
즉 대가성 리베이트 근절을 위한 제약사와 의사 양측 노력을 모두 주문한 셈이다.


굳이 사법부 판결을 재차 들추지 않더라도 동영상 강의를 순수 교육용이라고 떼쓰는 동아ST의 항변을 순순히 받아들일 국민은 없어 보인다.
 
국내 제약사는 물론 한국에 법인을 둔 글로벌 제약사들이 번갈아가며 불법 영업 근절을 외쳐온 최근 일련의 활동들과 이번 동아 동영상 리베이트 판결 내용은 평행선을 그리며 역설의 딜레마에 빠진 모습이다.
 
얼마전 불거진 순천 내과 리베이트, 고대 안산병원 내과 교수 리베이트 사건 역시 평행선의 두께를 한층 짙게 만들었다. 이 같은 사건들은 결국 국민과 사회로 하여금 제약계의 리베이트 근절 의지를 의심케 만든다.
 
'앞에서는 전면 금지, 뒤에서는 뒷돈 제공'이라는 제약계 풍습은 스스로 우스갯거리로 전락시키는 꼴이다. 또 실제 리베이트 혁신을 실천에 옮기며 다소간 단기 실적 악화를 감내하면서도 청정경영을 지속 중인 제약사들을 조롱하는 처사다.
 
정부는 사실상 건보재정을 낮추기 위해 약가인하 정책에 고심을 거듭하며 제약사가 위축될 만한 제도들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리베이트를 뿌리뽑지 못하는 것은 제약계 스스로가 정부에 약가인하 빌미를 제공하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국가 미래성장동력으로서 환자를 치료하고 세계시장 진출에 나서려면 제약계는 리베이트라는 권위적이고 낡아 빠진 가죽구두를 버리고, 신약 개발, 청정경영을 목표로 R&D 투자 향상이라는 기동력 높은 새 운동화로 갈아 신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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