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논란을 보면서
2015.01.20 15:00 댓글쓰기

아주 오래 전인 초등학교 2학년때 있었던 일이다. 같은 반 친구가 담임 선생님께 질문을 던졌다. 샤프펜슬에 대한 내용이었다.

 

친구는 “연필은 깎기 너무 귀찮아요.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샤프펜슬을 갖고 다니고 싶어요. 그런데 집에서 허락을 안 해줘요. 선생님께서 사용해도 괜찮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라고 물었다.

 

담임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제대로 된 글씨체를 익히지 못했고, 샤프펜슬의 본래 용도는 설계도면 등에 쓰이는 ‘제도용’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하교 후 부모님께 학교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사실 이전부터 몇몇 친구들이 샤프펜슬을 갖고 다니는걸 보고, 은근히 부러웠다.

 

부모님 역시 선생님과 같은 시각이었다. 충분한 필기연습을 통해 자신만의 글씨체를 익히기 전에 샤프펜슬을 사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는 어린 마음에 조금 서운했다. 돌이켜보면 다 맞는 말씀이었다. 본래 목적과 용도에 맞도록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을미년 새해 초부터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여부를 두고 의료계와 한의계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정부의 규제 기요틴이 불씨를 던졌다.

 

그 동안 한의계는 의료기기 사용을 꾸준히 주장해왔다. 기술 발달로 첨단 장비가 출시되고 있는데 한의계만 배척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대한한의사협회 김필건 회장은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은 의료계의 방해 때문에 지난 70여 년간 비정상적으로 제한돼왔다”며 “국민 다수가 찬성하고 있는 만큼 정부는 의료계 눈치 볼 것 없이 과감히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의료계는 오히려 ‘국민 안전성 퇴보’ 정책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연일 제기하고 있다. 규제완화라는 명목을 빌미로 직역 간 전문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라는 지적이다.

 

대한의사협회 추무진 회장은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의료 분야가 경제논리에 좌지우지 돼서는 안 된다”며 “올바른 의료체계를 붕괴시킬 수 있는 이번 정부 발표에 적극 반대하며, 철회하지 않을 경우 투쟁에 나서겠다”고 날을 세웠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양측 다 공통적으로 ‘국민 안전성’을 논리의 근거로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접근방식은 정반대다. 그렇다면 문제를 촉발시킨 정부는 어떻게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할 것인가.

 

규제완화 정책의 장점보다 폐단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료는 다른 산업보다 훨씬 더 안전성이 중요시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2015년 1월 의정부 화재 등 대형사고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는 원인이 바로 규제완화다. 경제논리에 집착해 최소한의 안전장치까지 세워두지 않을 경우 어떠한 결과로 돌아오는지 전 국민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여부도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는 CT, MRI와 같은 장비는 관련 학과(영상의학과)가 있을 정도로 단순히 찍고, 판독만 하는 의료행위가 아니다. ‘해석’이 뒷받침돼야 하는 영역인 것이다.

 

지난해 창립 100년을 맞은 북미영상의학회(RSNA)을 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6만여 영상의학 관련 의료진이 몰리는 RSNA는 첨단 의료기술의 향연장이다.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임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 의료계 인사는 “한의대에서 영상의학 관련 강의를 과연 국민들이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을 공감할 정도로 해왔는지 짚어볼 시점”이라며 “각 직역에 맞게 진단을 하고 진료를 하는 현행 제도가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반문했다.

 

지난 2012년에는 한방 피부자외선 치료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대한피부과학회 계영철 이사장은 “‘광’에 대한 개념만을 배우고 있는 한의계와 50년 이상 축적된 임상증례를 바탕으로 체계적 교육을 하는 피부과를 동일선상으로 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의료계에서는 “한의사들이 정말로 의료기기를 사용하고 싶으면 그에 합당한 교육 과정을 먼저 이수하고, 제대로 된 진료를 할 수 있는 사실부터 입증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90년대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샤프펜슬을 쓰고 싶으면 먼저 글씨체부터 제대로 익히고, 그 다음에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말씀이 오버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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