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괴담(怪談)' 부끄러운 우리네 자화상
김민수 기자
2015.06.02 12:20 댓글쓰기

‘임진년의 세월은 정초부터 흉흉했다. 그 전해에도 그랬고, 또 그 전해에도 그랬다. 길삼봉이라는 이름의 허깨비가 구름을 타고 돌아다니며 산천에 피를 뿌리고 있었다. (중략) 길삼봉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길삼봉을 보았다는 자들이 전국에서 속출했다.’ <칼의노래--김 훈>

 

‘남이 믿으니까 나도 믿는다는 식에서 남이 열심이니까 나는 더욱 열심히 하는 식의 종교집단에서 흔히 보는 열기(熱氣)의 상승효과도 그런 그들(황건적)의 세력이 한층 빠르고 널리 퍼져나가는 걸 도왔다.’ <삼국지--이문열 평역>

 

메르스 사태가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있다. SNS 등을 통해 유언비어는 일파만파 퍼지고, 정부의 부실한 초기 대응은 연일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사스(SARS), 신종플루(H1N1), 메르스(MERS)와 같은 바이러스 발생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서 소설들의 배경이 된 과거보다 매스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에는 유언비어가 더욱 빠르게 확대·재생산되기 마련이다. 단 1초면 지인에게 진실로 둔갑한 ‘길삼봉’을 전파할 수 있다.

 

이번 메르스 사태에 있어 의료계와 국민들은 정부의 사후 대처방안을 보며, 적지 않은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다급해진 정부는 괴담 유포자를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아직까진 오히려 역효과만 나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는 ‘해당 병원이 어디인지부터 공개하라’는 댓글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 의료계 인사는 “전문가들과 일반 국민들의 공포심에는 큰 차이가 있다”며 “불필요한 공포심이 확대·재생산되서는 안 된다. 공포심에도 과학적 객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개원의는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감염자들이 거쳐간 병원을 공개하지 않아 인터넷과 SNS에는 여러 병원들이 거론되고, 병원에 가는 것 자체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내 유명 메신저를 통해 전파되고 있는 메르스 관련 내용을 확인봤다. 그 내용을 보니 “해외에서는 우리나라가 긴급재난 1호 상황이라고 실시간 뉴스로 뜨고 있다”, “에볼라나 사스보다 심각할 것으로 예상되니 조심해야 한다”는 등 과장된 문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추가로 특정 병원명까지 거론돼 대중들의 공포감을 극대화시키는 등 부작용 폐해가 너무 크다. 메르스 사태 해결의 본질이 아닌 자극적이고, 사회적 혼란만 가중하는 ‘허깨비’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형국이다.

 

전국보건의료노조는 “메르스 관련 괴담 확산은 정부의 탓”이라며 “시급히 환자 안전을 위한 비상체계를 구축하고 지정병원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또한 3차 감염 예방을 위한 철저한 방역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와 같은 현상이 매번 국가적 대형사건이 터질 때마다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09년 8월 전국의사총연합은 신종플루 관련 성명서에서 “정부의 초기 대응과 사후 대책에 대해 대단히 실망스럽다”며 “정부로부터 어떠한 안전대책이나 제도적 지원 없이 진료를 강요받음으로써 실제 의료현장에 대단히 큰 혼란이 발생했다”고 꼬집은 바 있다.

 

6년이 지난 현재에도 바이러스 발생 시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괴담으로 인한 대중들의 실체 없는 공포’와 ‘정부의 미숙한 대처’라는 이중고에 치이고 있는 의료계가 깊은 한숨만 내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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