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e than internet' 모토 실현해 보겠습니다'
2011.01.30 08:19 댓글쓰기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전문기자’로서 새로운 장(場)을 연 홍혜걸 씨. 홍혜걸 기자는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16년 넘게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MBC, KBS, SBS, EBS 등 인지도 높은 프로그램의 MC로, 기자로 종횡무진 활약해 왔다. 방송, 라디오, 신문, CF 등을 막론하고 거침없이 질주해온 그다. 하지만 홍 씨에게도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다. 황우석 논문 관련 ‘엠바고 파동’ 이다. 지난 2004년 터진 이 사건으로 그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세간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몸도 마음도 지친 홍 씨는 2007년 정든 중앙일보를 떠났고 그간 초야에 묻혀 지냈다. 데일리메디가 홍혜걸 기자를 만나 ‘엠바고 파동’에 대한 사건의 전말부터 최근 근황, 향후 포부까지 모든 것을 들어봤다.

의학 저널리즘 포문을 열다

홍혜걸 기자는 의사 면허를 취득했지만 엉뚱하게도 기자의 길을 걷게 됐다. 지금이야 20명 남짓 의사출신 기자들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홍 씨가 최초였다.

“1991년 2월 졸업 후 인턴 1년을 마치고 바로 군의관으로 갔는데 허리를 다쳤어요. 7~8개월만에 전역을 했죠. 당시 실연의 아픔을 겪었는데 엉뚱하게도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식이 ‘분풀이’로 분출됐던 것 같아요. 다른 분야에 대한 생각을 하던 차에 중앙일보에서 ‘의학전문기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바로 지원을 했고 1992년부터 기자생활이 그렇게 시작된 거죠.”

홍 씨는 ‘최초’가 되고 싶었다. 의사출신 법조인이 되겠다는 마음을 품고 사법고시도 잠깐이나마 준비했지만 앞서 3명이나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방향을 틀었다. 이렇게 그는 최초의 ‘의학전문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기자라는 직업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선임에게 첫 보고를 했을 때 들은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겨울철에 덜덜 떨면서 공중전화에서 보고할 자료를 옆에 다 놓고 선임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그런데 선임이 ‘아이 XX,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전화해’라며 끊는 거예요. 그때 들은 생각이 ‘내가 왜 기자가 되려고 하는 거지?’ 자문하게 되더라구요.”

지금도 가끔 의학전문기자가 되고 싶어 하는 후배 의사들이 상담조로 전화를 걸어온다. 그는 후배들에게 "의사 프리미엄을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는 생각을 갖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직언을 해준다.

“사람들은 제가 ‘의사라서 특혜를 받았겠지’라고 오해를 많이 했어요. 그렇게 많은 방송 MC에, CF를 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나바요. 그런데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제가 방송을 타기 전 10년 동안은 정말 기사만 썼어요.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거죠. 입사 동기들과 똑같이 6개월 수습받고 월급도 더 준다는 제안도 있었지만 똑같은 대우를 받고 생활했어요.”

홍 씨는 우리나라에서 ‘의학저널리즘’의 포문을 연 장본인이다. “군사, 교육, 법률 등 전문가 출신 기자들이 많고 저널리즘이 꽃피우고 있지만 가장 성공한 분야는 의학저널리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의학은 정말 전문가가 필요한 분야거든요. 제 뒤로 의학전문기자가 늘어난 걸 보면 ‘저를 보고 다른 매체에서도 의사 출신 기자에 대해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해요.”

인생의 오점 엠바고 파동…"억울해요"

하루하루 몸 담고 있는 곳에서 ‘신뢰’를 쌓아가고 있을 무렵인 2004년 2월, 홍 씨에게 ‘엠바고 파동’사건이 터졌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관련 국제 논문을 보도 전날 입수해 다음날 1면 톱으로 나간 것이다.

“데스크에서 절 부르더니 황우석 교수 논문을 보여준 거예요. 제가 보니 이건 ‘특종감’이었죠. 그래서 그 때는 부담이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바로 기사를 썼어요. ‘엠바고’라는 것이 모든 기자들이 기사에 대해 알고 있고, 어느 시점 이후에 보도하자고 약속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까요. 아마 다른 매체에서는 몰랐을 거예요. 제가 ‘엠바고’를 왜 깨겠습니까.”

반향은 생각보다 컸다. 다음날 ‘특종에서 물 먹은’ 모 매체에서 황우석 교수가 국제학회에 발표하기도 전에 논문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애국자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당시만 해도 황우석 교수는 애국자나 마찬가지였다)’는 기사가 1면 톱으로 실렸다. 홍혜걸 기자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거의 매장당할 위기였다.

“다음날 바로 황우석 교수가 있는 미국으로 날라갔어요. 얼마나 다급했는지 짐작이 가시죠. 국제학회 행사장에 찾아가 상황이 이렇게 돼서 죄송하다고 싹싹 빌었어요. 어쨌건 피해를 준 것은 맞으니까요. 그 자리에서 황 교수가 약속 하나를 해 줬어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엠바고’로 비난을 하지 않겠다. 그런데 정말 저를 살리신게 한국으로 와서 이 일에 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 사건은 쉽게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자기가 특종을 쓰기 위해 기자들과의 암묵적 약속인 ‘엠바고’를 깬 것처럼 상황이 돼 버려서 과학기자협회에서도 제명을 당해야 했다.

“당시 생로병사 MC를 맡고 있었는데 이일로 인해 하루에 2~3개 이상 바쁘게 활동하던 방송에서 거의 모두 하차하게 됐어요. 당시 프로그램 PD가 자기도 홈페이지 게시판의 비난 글까지는 커버를 해주겠는데 공식적으로 ‘제명’을 당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결국 처음 프로그램 생길 때부터 2년 넘게 해왔던 MC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어요. 참 억울한 면이 많았죠.”

그렇게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번엔 외신 당직자가 모르고 또 다시 ‘엠바고’를 어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엠바고 파동’의 중심인 홍혜걸 기자는 당시 진행하고 있었던 MBC 모 프로그램에서 갑자기 하차 통보를 받아야 했다. 인터넷에서 그 화살이 홍혜걸 기자한테 온 것이다.

“2005년 5월 외신기자 실수로 엠바고가 깨진 사건 때 모 매체에서는 제가 눈엣가시였을 거예요. 또 기사를 써서 보도했죠.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저도 참 억울한 사람인데 치졸한 것 같기도 하고 힘도 빠지고 회의가 많이 들었어요. 이런 일로 이렇게 시달려야 하나 싶고.”

그러던 중 PD 수첩에서 황우석 교수가 난자를 채취했을 때 금품을 제공했다는 등의 ‘황우석 흠집내기’ 방송이 전파를 탔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황우석 교수 논문이 ‘가짜’라고 밝혀졌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PD수첩이 방영된 이후 모든 토론프로그램에서 토론회를 진행했는데, 황우석 옹호자를 찾다 제가 흑기사로 나간 거예요. "국익을 위해 진실을 감출 수도 있다"고 얘기했는데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교각살우(矯角殺牛)’가 되면 안 되죠. 그런데 그렇게 방송을 출연하고 난 후 일주일뒤 황우석 교수 논문이 가짜라고 판명이 났어요. 졸지에 제가 또 바보가 됐죠. 이번에는 정말 할 말이 없더라구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됐죠.”

‘엠바고 파동’을 겪으면서 홍혜걸 기자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지 ‘위기 매니지먼트’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겠다는 확신도 섰다.

“‘엠바고 파동’은 제 인생의 오점으로 남게 됐죠. 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적과 친구가 분명해졌고, 앞으로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좀 거창하게 들리지만 분명해졌어요. 나를 지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내 남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억울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여러 상처를 겪고 쉬고 싶다는 마음으로 2007년 그는 사회 첫 발을 들인 중앙일보에서 16년의 기자생활을 접었다.

‘1인 미디어’ 실현‥책 집필 공개강연

“벌써 4년째네요. 중앙일보를 나와 프리랜서로 활동한지 말입니다.”

홍혜걸 기자는 여전히 강연하고, 방송도 하면서 책도 집필하고 있었다. 한참 바빴을 때를 돌아보면 정말 숨 가쁘게 기자일에 방송일까지 눈 코뜰새 없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어느날 운동을 하는데 숨이 차왔어요. 이건 분명 결핵아니면 암인데 결핵으로 나왔거든요. 이건 뭘 의미하느냐. 몸이 망가진 지도 모르고 일을 했다는 거예요.”

이제 그는 조금 여유있는 삶을 살고 있는 듯보였다. 어디에 소속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꿈을 펼쳐나가고 있다. “직접화법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다”는 ‘소통의 저널리즘’을 피력했다.

“지금은 다시 재기에 성공했어요. 정규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강연 요청이 들어오고 있고 글도 쓰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소속돼 있지 않아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잖아요. 인터넷이 발달돼 있고. 이제는 저의 직접화법으로 대중에게 다가서고 싶어요. 예전처럼 선명성의 싸움인 지사형 저널리즘이 아닌 소통형 저널리즘이 중요해지게 됐죠.”

홍혜걸 씨는 "1인 미디어를 실현하겠다"는 포부를 소개했다.

“의학은 중요한 주제예요. 평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의학 정보를 정치색을 배제하고 알려드리고 싶어요. ‘More than internet'이 제 모토예요. 인터넷에 나오지 않는 정보, 잘못 알려진 정보를 발굴해서 알려주고 싶죠. 아마 앞으로 의학전문기자들이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요.”

곧 있으면 홍혜걸 이름 석자가 박힌 책도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제 이름의 출판사를 만들어 책을 내고 싶어요. 미국은 이미 의사 출신 기자들이 정보 전달을 많이 하고 있거든요. 인도 출신인 ‘싼제이 구타’도 의학전문기자로 유명한데 이번에 아이티에서 취재차 갔다가 수술을 집도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저의 동경의 대상입니다.” 인생 격랑의 시간을 넘긴 그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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