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교약졸(大巧若拙)
권은중 차장(한겨레신문 편집국)
2014.01.06 00:22 댓글쓰기

 

올해 추석 전에 친구가 새 오디오를 샀다고 해서 들으러 갔다가 그 집 식탁위에 놓인 홍삼 선물세트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활기’라는 선물세트 박스에 그려 있는 꽃 그림이 너무나 근사했기 때문이다.


작은 꽃들이 붉고 파란 색의 보색 대비로 절도 있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 식의 격조 있으며 힘이 넘치는 포장 상자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포장이라는 게 그저 무늬없이 깔끔하면 된다는 생각을 해온 터였다.


그런 내가 쓰레기통으로 갈 상자의 겉그림을 보고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이었다. 포장을 자세히 보니 남천 송수남 선생의 그림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선생은 홍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다가 동양화로 전공을 바꾸고 주로 꽃을 그렸으며 올해 세상을 떴다고 했다. 서양화도 동양화도 아닌 듯한 묘한 매력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러다 최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남천 선생의 전시회에 갔다. 난초 매화 국화 등을 그린 그림 30~40여 점이 전시됐다. 남촌은 수묵화인데도 불구하고 작은 꽃에도 세심하게 명암을 줬다. 동양화에 약간의 서양화적 기법을 가미한 것이다.


그가 그린 꽃들도 아름다웠지만 꽃들 옆에 쓰여진 고졸한 글들이 더 눈을 끌었다. 그 글들은 규격에 맞춰 반듯하게 쓰여진 예서나 해서가 아니라 무심하게 써내려간 독특한 서체였다. 추사체처럼 새로운 양식도 아니었고 서양화를 전공해 서예실력이 부족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글씨만 놓고 보면 엉성했다.


하지만 글씨는 그의 그림과는 묘한 조화를 이뤘다. 큰 기교는 약간 부족해 보인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말이 떠올았다.
비슷한 경험이 또 있다. 올 여름 오디오 앰프를 새로 구입했다. 기존에 쓰고 있던 앰프는 매킨토시다. 매킨토시는 70~80년대를 풍미한 미국의 앰프로 파란 창을 가진 전원부가 트레이드마트다. 어릴 때부터 동경해왔고 고가인 만큼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한 뒤 꽤 오랜 시간 돈을 모아서 샀다. 파워앰프의 무게가 50kg이 넘는 거구로 재즈나 팝을 내가 원하는 소리로 들려줬다. 


 20년을 이 오디오와 함께 보냈는데 올해 네임이라는 영국제 앰프를 하나 더 구입했다. 특이하게도 이 엠프는 프리앰프의 전원부가 없다. 구형의 경우 모양이 도시락통 같이 생겼다고 해서 오디오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시락 앰프로 불린다.


하지만 작지만 구동력이 좋아서 대형 스피커를 잘 울려낸다는 말을 듣고 구입했다. 2년전 대형 스피커를 하나 구했는데 매킨토시가 새 스피커를 울리기에 힘에 부쳤기 때문에 고민을 하던 터였다.


하지만 네임은 매킨토시에 견줘 너무 작고 가벼워서 구입하고도 반신반의했다. 프리앰프와 파워앰프를 합쳐도 10kg 남짓한 무게였다. 세종시에 살고 있는 나는 서울까지 가서 모셔온 네임이 들려준 첫소리는 제법 놀라왔다.


조그만 녀석이었지만 힘이 좋았고 게다가 선명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매킨토시의 포용성과 달리 잘못 구워진 음반은 가차없이 잡아내는 선명함이 서릿발 같았다. 약간의 착색이 있었는데 기초화장만 한 물광피부 같았다.


20년지기인 매킨토시는 거실에서 퇴출 돼 침실에서 라디오와 물려서 듣고 거실을 검은 도시락통 같은 네임이 차지했다.
 네임과의 하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 가을 갑지기 네임이 퍽하면서 망가져 버렸다.  중고니까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당해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겨우 좋은 소리를 듣게 됐다고 흡족했는데 몇 개월만에 망가져 버린 것이었다.


실의에 빠진 나는 곧바로 휴가를 내고 서울로 가서 오디오 수리에 돌입했다. 진단은 간단했다. 콘덴서 하나가 타버렸다는 것이다. 암으로 생각했는데 양성종양이 발견돼 그저 간단한 시술로 제거할 수 있다는 진단에 나는 안심했다. 


그런데 수리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수리 기사가 담배를 피면서 오디오를 고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알찬 소리를 밀어내는 네임의 파워앰프가 다소 엉성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부품으로 채워진 기판 2장에 전원 코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절반쯤 비어있었다.


고작 이걸로 그 덩치 큰 스피커를 울린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서 물어봤다. “기사님. 원래 이렇게 텅 비어 있나요.” 그러자 기사가 귀찮다는 듯이 담배연기를 뿜으면서 이렇게 말했다(난 담배를 안 피운다). “요새 거는  다 이래요. 비쌀수록 더 심하고…”
요즘에는 반도체가 많은 회로를 대신하기 때문에 오디오가 단촐하다는 것이다. 영국제 오디오 코드는 자체 반도체 설계기술이 있어 오디오가 다른 회사의 절반 크기지만 짱짱한 성능를 선보인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코드 제품 가운데 일부는 실제 무슨 화장품 통같이 생겼다. 실력 있는 오디오들은 이미 대교약졸의 경지로 들어간 셈이다.


대교약졸의 백미는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자화상이다. 까까머리 어린아이를 그려놓고 그 밑에 “바보야”라고 써놓은 그림이다. 2007년 당신이 졸업한 동성고등학교 100주념 때 공개된 그의 그림은 당시 화제가 됐다. 형식이나 내용이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85살로 연로했던 그가 최초로 전시회를 염두하고 그린 그림은 나뿐 아니라 여러 곳에 울림이 있었다.


그림을 설명해달라는 동성고 후배들에게 그는 “부끄러운 그림이다”라고 설명을 사양했다. “그러면 바보야는 뭡니까”라고 재차 묻자 “내가 바보같아”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다 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에게 한 말이 바보야라니. 그가 선종했을 때 그의 마지막을 보려고 많은 인파들이 명동에 길게 늘어섰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은 순간 보면 참 근사하다. 이른바 명품들이 그렇다. 하지만 각지고 번쩍이는 명품의 속성이 그렇듯이 매일같이 입고 잘 수는 없다.


나를 돌아보는 나만의 공간에서는 명품보다는 허름하지만 손때 묻은 옷들이 더 편하고 포근하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 나오는 ‘예쁠 것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를 닮은 옷들 말이다. 


 주역의 64괘 가운데 ‘천산둔’이라는 괘가 있다. 위에 하늘을 뜻하는 긴 효가 3개(건)와 아래 땅을 뜻하는 분절된 효가 3개(땅 곤)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과 땅이 조화롭게 자리잡은 모습이다. 당연히 나는 이 괘가 64개 괘 가운데 제일 좋은 괘인 줄 알았다. 보기에 그럴 듯하니까.


그런데 이 괘는 이제 물러나야 한다는 은둔을 뜻한다.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라 64개 괘 가운데 가장 안좋은  괘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숨어야 한다는 거다. 보기에 그럴 듯하고 가장 좋아 보이는 때가 사실은 위태롭고 그래서 허무한 때라는 의미다.


대교약졸.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의 지혜는 옹졸해 보인다. 그래도 매년 여름 나무보다 더 많은 개체수로 들판을 덮는다. 곧게 서는 나무는 곧 베어져서 없어지지만 구부러진 나무는 살아남아 선산을 지킨다. 남에게 뒤지면 큰 일이 나는 줄 알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높게 똑바로만 가려는 우리들이 곱씹어봐야 할 말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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