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의 그리움과 공허한 탄식
박대진 기자
2016.11.09 10:34 댓글쓰기

깊은 한숨이 막걸리 잔에 출렁였다. 안주는 왕년(往年)의 무용담이었다. 그렇게 연거푸 비워진 탁배기는 옛 시절의 그리움을 더욱 진하게 소환했다.

 

“그랬지, 그런 시절이 있었지.” 옆에서 격한 동조가 일었다. 취기의 원인이 술인지 추억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가 달아 올랐다. 그렇게 탁배기 병은 자꾸만 늘어갔다.

 

친분이 있던 몇몇 중소병원 원장들과의 격없는 술자리. 이날 그들은 깨나 늦은 시간까지 막걸리 잔 위로 왕년의 회상을 그치지 않았다.

 

이들이 내뱉은 한숨의 근원은 바로 ‘그리움’이었다.

 

이 그리움의 어원은 ‘긁다’이다. 글과 그림도 마찬가지다. 종이에 긁어 새기는 것은 ‘글’이요, 선이나 색으로 화선지에 긁으면 ‘그림’, 마음에 긁어 새기면 ‘그리움’이 된다.

 

‘의사’라는 직업이 누렸던 호사(豪奢)의 기억이 맘 속에 아롱 새겨져 있었던 탓이다. 역으로 그 때의 기억을 강제소환할 만큼 작금의 상황이 퍽퍽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참석자 중 한 원장이 “갑질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라고 너스레를 떠니 옆에 있던 원장이 “을이 무슨 갑질이냐”며 핀잔을 줬다.

 

이들은 병원과 가정은 물론 최근에는 은행에서도 ‘을(乙)의 신분’으로 전락했다고 입을 모았다. 일견 공감이 일었다.

 

먼저 이들의 주된 활동영역인 ‘병원의 삶’을 들여다 보자. 간호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그렇다고 의사 채용이 만만한 것도 아니다.

 

점점 심화되는 의료 양극화의 그늘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인건비를 양산했다. ‘서울로 서울로’를 외치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바라만 봐야 하는 지방 중소병원 원장들의 가슴은 애가 탄다.

 

실제 보건복지부가 의료인력 공급현황을 조사한 결과 의사 74.23%, 간호사 69.85%가 서울 등 대도시와 수도권에 몰려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구인난에 따른 인건비 인상 부담은 물론 ‘이별 통보’가 두려워 의사와 간호사 비위를 맞춰야 하는 신세다.

 

환자들과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의료인 대상 폭언과 폭행 사건이 끊이질 않고,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진료실에서는 환자 눈치를 살펴야 한다.

 

요즘에는 의사의 유일한 자존심이었던 처방권 마저 위협받고 있다. ‘의사 선생님’으로 불리며 존경받던 시절이 있었나 싶다.

 

가정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예전 보다 뚝 떨어진 수입에 가장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실제 고용노동부가 직업별 연봉을 조사한 결과 의사의 평균연봉은 7820만원으로, 변호사 9662만원 보다 2000만원 가까이 낮았다.

 

개원가와 중소병원들의 경영지표는 심각성을 더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06년 8000억원이었던 의료기관들의 금융대출 규모가 1조원을 넘어 최근 2조원에 육박한다.

 

특히 빚을 갚지 못해 건강보험 진료비를 압류 당하는 의료기관도 2006년 86곳에서 2013년 893곳으로 급증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동네의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은행에서도 냉대다. 금융권에서 통용되던 ‘의사=신용’ 공식이 무너진지 이미 오래 전이란 푸념이 그래서 나온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이른바 ‘묻지마 대출’의 최대 수혜자였던 의사들은 그 위상 추락을 실감해야 하는 상황이다. 의사 대상 대출은 줄었고, 금리는 대폭 올랐다.

 

실제 씨티은행은 닥터론 한도를 기존 4억원에서 3억5000만원으로 하향조정했고, 하나은행도 의사 신용대출 상한액을 3억원에서 2억원으로 축소시켰다.

 

한 중소병원 원장은 “예년에는 은행들이 거래를 트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이제는 대출 부탁을 위해 읍소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구구절절 맞는 얘기다. 한숨 섞인 갑(甲) 타령을 칠 만도 하다. 가슴 속 긁힌 상처의 그리움을 소환하고 싶은 심정도 십분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다.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시대는 변했다. ‘의사’ 역시 그 조류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직종임을 부인하면 곤란하다. 왕년(往年)은 말 그대로 과거다.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현실 부정보다 더 슬픈 현실은 의사들의 그 깊은 한숨을 곧이곧대로 받아 줄 아량이 우리 사회에는 없다는 점이다. 의사들이 소위 말하는 ‘Non MD(비의사)’들에게는 그저 ‘갑의 한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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