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급여 우선순위 결정과 국민참여 의미'
장수목 국민건강보험공단 급여보장실장
2016.12.04 20:25 댓글쓰기

우리나라는 의료보험제도 도입 이후 12년만에 ‘보편적 건강보장(UHC)’의 가장 중요한 축인 전국민 보험적용을 달성했다. 반면에 2가지 다른 축인 급여범위(의료서비스)와 환자의 본인부담 수준에 있어서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그동안 정부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하는 데 많은 노력과 자원을 투입해 왔다. 그럼에도 비급여 서비스의 증가 등으로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2014년 소폭 개선됐을 뿐이다.


최근 건강보험의 재정흑자가 쌓이면서 공적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국민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문제는 재정이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인구 고령화, 질병구조의 변화(급성에서 만성질환 중심), 신 의료기술의 발전 등 환경을 고려할 때 현재의 보험재정이 그리 넉넉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보장성 확대’를 위해서는 한정된 재원 하에서 어디에, 어떻게 보험재정을 배분할 것인가 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즉 국민의 보장성 확대 요구를 효율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급여 확대의 우선순위에 대한 사회적 가치판단이 긴요하다.


전문가에서 국민으로 변화하는 정책 결정 
 
전통적으로 보장성 확대에 관한 의사결정은 정부나 그 실무를 주관하는 보험자의 몫이었다. 이러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전문가 집단의 의견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즉 경합되는 서비스들 중에 급여확대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의료적 중대성이나 치료효과성, 비용효과성 등의 고려기준과 관련해 분야별 임상전문가나 학자, 연구자 등의 의견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급여의 재원이 되는 건강보험 재정을 부담하는 주체이자 보장성 정책의 직접적 수혜대상인 국민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현재 건정심 위원으로 2명의 시민・소비자단체 대표와 근로자・사용자단체, 농어업인・자영업자단체의 대표들도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최종 의사결정 단계가 아닌 대안의 검토 단계부터, 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일반 국민 관점과 느낌을 반영한 토론과 사회적 가치를 고려한 수용성 검증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전문가 의견 뿐만 아니라 국민의 의견을 함께 고려하는 균형있는 정책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다수의 선진국들은 건강보험의 급여 우선순위를 결정함에 있어 시민위원회, 시민배심원제도, 지역사회 회의 등 다양한 대중 참여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1987년 노르웨이가 처음으로 우선순위위원회를 도입한 이래, 1991년 미국 오레곤 주는 급여우선순위 목록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역사회 회의(townhall meeting)를 신설했다. 1993년 스웨덴은 시민배심원제도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뉴질랜드도 같은 해부터 핵심서비스위원회에서 설문조사, 시민회의 등의 방법을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영국은 1996년에 국립보건임상연구소(NICE)에서 시민위원회(Citizen Council)를 처음 조직하여 2002년 11월에 공식 출범하였다. 시민위원회는 주요 급여 사안 뿐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쟁점들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그 결과를 NICE 홈페이지에 보고서로 게시하고 있다.


캐나다 역시 2010년부터 온타리오 주에서 시민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이렇듯 보장성 정책에 국민이 참여하는 제도는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국민참여 제도는 비록 참여자 수가 제한되는 단점이 있으나, 제공된 정보를 바탕으로 학습과 숙의(deliberation)를 통해 대중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다.


국민참여위원회 역할과 과제

국내에서도 급여 확대 시 일반 국민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추진됐다. 우리 공단은 해외사례를 벤치마킹해 2012년에 ‘급여우선순위 국민참여위원회(이하 국참위)’를 처음 도입하여 4차례에 걸쳐 운영해오고 있다.


2012~2013년에 개최된 두차례 회의에서는 30명의 국민위원들이 각각 45개와 34개의 의료서비스 급여우선순위를 논의했다. 그 결과는 2013년 추가 보장성 확대 및 2015년 2월에 공표된 중기(2014~2018) 보장성 계획에 반영됐다.


2014년에는 상·하반기에 3차, 4차 회의가 개최됐으며, 치과 임플란트의 건강보험 적용방안과 급여우선순위 결정기준을 논의하여 마련하는 등 가시적 성과를 도출했다. 2015년에는 국참위의 그동안 운영성과를 평가하고 개선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지금까지의 국참위 운영경험을 되돌아 볼 때, 먼저 대중의 눈높이와 국민적 정서를 통해 급여우선순위를 여과함으로써 보장성 정책의 적절성, 수용성, 신뢰성이 높아졌다. 흥미로운 것은 국민위원들이 충분한 정보제공과 토론을 거치면서 처음 시작시의 이해적 관점을 버리고 공공의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며, 보험 혜택과 함께 부담의 필요성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치과임플란트의 급여범위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보였다(1개만 급여 의견이 시작 시 37%에서 토론 후 76%로 변화). 또한 보장성 확대를 위해서는 추가 부담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증가했다(69%→90%).


참여자 측면에서는 국민을 대표하여 참여했다는 보람과 자신의 의견이 정책에 반영된다는 자부심으로 정책결정 후 든든한 후원자 내지 지지자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책결정 측면에서 보장성 확대가 기존의 전문가 중심 논의에서 벗어나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는 양대 축 중심의 균형된 접근을 이룸으로써 정책의 발전과 보다 성숙된 시민참여 문화 조성에도 일조했다.


앞으로 국참위 운영을 보다 내실화하기 위해서는 국민참여 위원이 환자의 과도한 이익에 치중하여 보편적 보장성에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도록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공정한 토론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일회성 위원 모집보다는 임기제 또는 인력풀제 운영을 통해 참여자의 전문성을 높이고 학습과 숙련 효과를 높일 필요가 있다.


논의 의제에 있어서도 5년단위 보장성 강화계획 수립 시의 급여우선순위와, 보험재정 영향이 크거나, 전문가간 또는 이해관계자간 가치 충돌 등으로 사회적 논란이 예상되는 이슈 등은 국참위의 논의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아울러 국참위에서 논의된 결과를 일반 국민이 알 수 있도록 공시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본다.


중국 요임금은 큰 길가에 깃발을 세워 그 깃발 밑에서 정책에 대한 좋은 의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하게 했다고 한다(사기, 進善之旌). 이 같은 국민참여 제도야 말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대표적 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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