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감 팽배 '대학병원'… 냉가슴 앓는 '노조'
경영 악화 따른 '고통 분담' 확산…올 춘투·하투 등 파업 거의 없어
2013.10.21 19:47 댓글쓰기

경희의료원 119일, 가톨릭의료원 217일.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지난 2002년 대한민국 병원사(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장기파업 사태는 이 후 적잖은 후폭풍을 불러왔다. 해당 병원들은 경영수지 악화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 반면 노동조합은 ‘파업’의 위력을 대내외에 입증시키며 노사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병원노조의 위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환자 피해를 우려한 정부가 직권중재 대신 필수유지업무제도를 전격 도입하면서 판세는 뒤바뀌기 시작했다. ‘파업 효과’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노사협상 기상도 역시 변했다. 여기에 최근 병원들의 경영환경 악화로 ‘고통분담’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병원노조 활동 위축을 가속화 시켰다. 실제 2000년대 매년 등장했던 춘투(春鬪)나 하투(夏鬪)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편집자주]

 

서릿발 날리던 노조


1998년 산별노조 설립은 병원 노사관계에 일대 변혁을 예고했다. 각 병원별로 협상을 진행하던 방식에서 병원 사용자와 노동자가 큰 틀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新 협상체제로 전환을 의미했다.


물론 산별노조 설립이 곧바로 산별교섭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노조의 세(勢) 불리기에 부담을 느낀 사용자 측이 회의적 태도를 보이며 난항을 거듭했다.


하지만 2002년 가톨릭의료원과 경희의료원의 장기파업 사태는 사측 인사들을 바짝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막강한 조직력을 앞세운 보건의료노조의 지원은 장기파업을 가능케 했고, 병원계 전체에 노조와 파업의 위력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정상적인 업무는 마비됐고, 노조는 연일 매스컴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투쟁의 깃발을 높이 세웠다. 장기간 파업이 진행되면서 병원 이미지는 급격히 실추됐고, 다른 병원들도 그 과정을 똑똑히 목도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병원 노사는 산별중앙교섭에 전격 합의했다. 실제 노동백서에서도 당시 장기파업 사태가 산별교섭 전환의 시금석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언급돼 있다.


산별교섭 출범으로 막강한 협상력을 갖게 된 노조는 잇따라 굵직한 성과를 올리며 교섭 방식 전환의 수혜를 톡톡히 누렸다.


모였다 하면 1만 명 이상이 운집했고, 이 인원은 분쟁이 발생한 병원으로 집결하는 탓에 일선 병원들에게 산별노조는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노조는 산별교섭 출범 직후인 2004년 당시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던 생리휴가를 유급화하고, 비정규직 5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여세를 몰아 2007년 산별교섭에서는 전국적으로 2384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켰고, 1541명에게 정규직과 동일한 임금 및 단체협약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했다. 막강한 결집력으로 단단히 서릿발을 날린 셈이다.

 

노사 전세 역전…필수유지업무제 도입


노조가 절대우위를 점했던 병원 노사 협상 테이블의 분위기는 2008년 ‘필수유지업무제도’ 도입과 함께 전세가 역전됐다.


이는 노조가 파업을 하더라도 병원의 필수유지 업무에 대해서는 필요 인력이 남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제도다. 때문에 도입 전부터 ‘파업권 제한’이라는 노조의 반발이 있었지만 정부는 국민 불편 최소화 논리로 밀어 부쳤다.


새롭게 도입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시행령에는 ▲응급의료업무 100% ▲중환자치료업무 100% ▲혈액종양내과 100% ▲분만업무 60% ▲신생아 일반업무 60% ▲수술업무 70% ▲투석업무 70% 등을 파업 시에도 유지토록 했다.


또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명시했다.


노사 양측이 협상에 실패할 경우 중앙노동위원회가 직권으로 중재안을 제시하는 기존 방식에서 필수유지업무제도로의 전환은 적잖은 변화를 불러왔다.


파업의 위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동시에 노조 입지도 크게 줄었다. 당연히 파업에 부담을 느끼지 않게된 병원들이 협상에서 여유     를 보이기 시작했고, 노조는 끌려가는 형국이 연출됐다.


실제 사용자 측은 이 제도가 도입된 직후인 2009년부터 산별중앙교섭에 불참, 교섭 자체가 2년 여 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노조는 사용자 측에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다그쳤지만 전세가 역전된 병원들로서는 더 이상 산별교섭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파업의 위력도 급감했다. 필수유지업무제도 도입 직전인 2007년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이 나란히 파업 투쟁을 벌인 이후 병원계 파업은 크게 줄었다.


물론 지난해 이화의료원, 남원의료원 등이 파업을 했지만 직권중재제도 시절 서슬 퍼렇던 파업과는 규모와 파급력에서 차이를 보였다.

 

“조직이 살아야 노조도 있다” 공감대 확산


엎친데 겹친 상황일까. 제도 변화로 달라진 위상을 고민하던 노조에 또 다른 악재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존립 자체를 고민케 하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 각종 규제 일변도식 정책이 계속되면서 병원들의 경영수지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적자의 늪’에서 병원들이 신음하기에 이른 것이다.


실제 대한병원협회가 회원병원 80곳의 의료수입과 의료비용을 조사한 결과 지난해 병원들은 8조8118억원을 벌어들인 대신 8조8321억원을 지출해 203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국립대병원들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13개 국립대병원에서 발생한 손실액은 사상 처음으로 1000억원을 넘겼다.


특히 ‘빅5’로 불리는 수도권 초대형 병원들도 잇따라 적자 소식을 전했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대병원은 287억원, 가톨릭의료원 257억원, 연세의료원 66억원, 삼성서울병원 11억원 등의 적자를 기록했다.

 

서울아산병원만 유일하게 70억원의 흑자를 냈지만 이는 상가임대와 장례식장 등 부대사업에 의한 이익이었고, 수술 및 진료 등 의료수익은 제자리 수준이었다.


이 처럼 각 병원의 살림이 녹록치 않게 돌아가면서 노조의 행보 역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이다. 병원이 어려운 상황에서 투쟁이라는 극단의 카드를 꺼내기가 부담스러운 분위기다.


실제 보건의료노조의 올해 교섭 방향은 전체 산별교섭 형식은 갖추되 상견례 이후 지부별 교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병원마다 경영 상황에 대한 시각 차가 크기 때문이다.


일단 전국보건의료노조는 2013년 임단협 승리를 위한 2단계 집중 공동투쟁 계획을 세워 놓은 상태지만 병원 경영수지 악화를 모른체 하기 힘들어 보인다.


병원 측 역시 상황이 상황인 만큼 노조가 예년과 다른 태도로 접근해 줄 것을 기대하는 눈치다. A 대학병원 관계자는 “수익을 보전하기도 힘든 상황을 노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조직원들의 고통분담이 절실한 시기”라고 말했다.


B 대학병원 관계자는 “조직이 없다면 노조의 존립도 의미가 없다”며 “우선 적자에 시달리는 병원의 경영 상황을 정상화 시키는게 급선무”라고 피력했다.


노조 측은 병원 상황에 대해서는 공감을 나타내면서도 고통분담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전략기획단장은 “물론 예전에 비해 대학병원들의 경영 상태가 어려워지기는 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 복지 부분이 역부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사립대병원이 경영 활로를 모색하고자 한다면 산별교섭 테이블에 진정성을 갖고 나서야 한다”며 “힘을 모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협상 태도를 문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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