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지는 의료사고 입증 책임 '무게추'
2014.12.26 11:58 댓글쓰기

[수첩]의료사고 입증책임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과거 입증책임을 두고 의료계와 환자 간 팽팽하게 맞섰던 대립구도가 故 신해철 사건을 계기로 의료계에 무게추가 기울고 있는 모양새다.

 

의료계와 환자는 의료사고 입증책임이 어느 쪽에 있느냐를 두고 오랜 세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민법 상에서는 원고에게 피고의 유책을 증명토록 하고 있어, 전문 영역인 의료소송에서 불리하다고 여기는 환자 측은 입증책임 전환을 꾸준히 요구해 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기구를 설립하기 위한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고, 무려 23년 간의 논의과정을 거쳐 ‘의료사고피해구제 및 의료분쟁조정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의료사고 입증책임을 제3의 기관인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부여한 것이다.

 

물론 의료인 역시 항소와 상고로 이어지는 의료소송에 수 년씩 매달려야 하고, 이 때문에 의료소송에 한 번 휩싸이면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문제 역시 설립 이유 중 하나였다.

 

중재원의 역할론이 급부상한 것은 신해철 사건 직후다. 2012년 설립 이후 2년도 넘은 시점이다.

 

의사나 의료기관이 중재를 거부할 경우 중재 개시조차 안되는 법 규정, 의료적 실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감정 역할의 소극적 운영 등이 언론에 조명되며 중재원의 존재 이유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이는 의료분쟁에 있어 환자가 여전히 '을'의 위치에 있다는 사회적 시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런 여론의 관심이 11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소위에 쏠렸다.

 

당시 법안소위에서는 의료분쟁 조정절차를 자동개시하는 내용을 담은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분쟁조정 등에 관한 법률 심의가 예정돼 있었다. 이미 ‘신해철법’이라 불리며 국민들로 하여금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의료계는 바짝 긴장했다. 자동개시만으로 의료사고 입중책임이 의료계로 옮겨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중재가 자동개시되면 의료적 과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감정이 이뤄지는데, 관련 서류 등을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의료인이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대한의사협회는 “권리 침해”라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고, 서울시‧충남도의사회는 새누리당 이명수 법안소위장에게 법안 통과 보류를 요청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문제는 의료계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입증책임 부담을 의료계가 짊어져야 한다는 여론은 뜨겁고, 법안소위 위원장이자 여당 간사인 이명수 의원조차 최근 “일정기준 이상의 의료분쟁은 중재를 자동개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더욱이 최근 대법원은 재판 시작 전 증거 수집을 위해 법원에 증인신문·검증·감정·문서제출명령을 신청할 수 있는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추진 중이다.

 

대법원은 민사소송 등에서 일반 국민들이 의료기관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경우 충분한 증거나 자료가 없어 절차상 불평등을 겪는다는 것을 인정, 대응책을 마련한 것이다.

 

만약 의료기관 등이 문서제출명령을 거부하면 재판부는 원고 측 주장이 진실하다고 인정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사실상 의료기관이 의료사고 입증책임을 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대법원이 내놓은 ‘사실심(1·2심) 충실화 마스터플랜’ 중 일부로, 대법원은 내년 초 외부위원이 중심인 ‘사실심 충실화 방안 연구 위원회’를 구성·운영하며 도입을 구체화하기로 했다.

 

물론 이 제도의 도입을 위해서는 국회 내에서 법률 개정 과정이 있어야 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법원에서 제기한 도입 필요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11월 법안소위 당시 신해철법이 논의되지 못한 것은 다른 법안 심의에 밀려 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다. 만일 다음 법안소위에 이 법이 또다시 상정된다면 어떤 심의결과가 나올까.

 

의료사고 입증책임에 대한 패러다임은 이미 변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의료계에서 하고 있는 일은 반대 입장을 표명한 성명서를 의원실에 쏟아내는 것뿐이다.

 

의료계는 달라진 상황을 직시하고 의료계와 환자 모두 상생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만들어 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지금은 반대할 때가 아니라 고민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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