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권분립의 한국에서 사법부 권한은 거의 절대적이다. 공정사회 구현이라는 기치를 내 걸고 3심제로 진행되는 사법부 절차인만큼 보건의료 관련 직능단체와 의료계는 의료산업 및 의료정책과 관련한 법정소송에 승소, 패소과 관계없이 결과를 적극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문제는 의료계에 상당한 파급력을 미치고 있는 법원 판결이 동일 사안, 같은 조건에서 정반대로 판결나거나 선고 결과가 뒤바뀜에 따라 병원, 의사 등 의료계 및 종사자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양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판이 소송 당사자 외 다수 대중이 인정할 만한 타당성과 객관성을 지녀야 하는 것임을 염두할 때 법원의 오락가락한 판단은 의료산업에 적잖은 여파를 가져오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 원외처방약제비 등 전체 의료산업을 뒤흔들 만큼 첨예한 제도 관련 재판을 비롯해 한 해 수 만건 이상의 소송이 진행되는 환자-병원간 의료 손해배상 소송에 있어서도 각 재판부 별 상이한 판결을 내놓는 경우가 빈번해 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불필요한 추가 소송 등으로 확장되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소송 당사자들의 고액 소송비는 물론 사법부 행정력 낭비와 인력 소모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의료계는 후폭풍이 거센 의료소송에 재판부의 법봉이 흔들리는 모습에 불만을 표명하고 있다.
사례 1 : 원외처방약제비
원외처방약제비 소송은 현재 세브란스병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학병원들이 참가해 수 십여건의 소송이 진행 중인 현안이다. 대법원이 서울대병원이 제기한 진료비 소송에서 “원외처방약제비의 책임을 병원에게만 돌리는 것은 위법이 있으므로 공단의 책임비율을 산정할 필요성이 있다”며 원심을 파기한데 따라 병원과 공단이 다시금 고등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대법 결정 이후 진행된 소송에서 경희대병원, 백병원, 이대병원, 고대병원 등 대다수 병원들은 20%의 원외처방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종전 인정받지 못했던 의학적 불가피성 20%가 수용되긴 했지만 대학병원들은 “병원으로서는 실익이 전혀 없는 원외처방에서 80%의 책임을 지라는 것은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런데 20% 책임비율을 깨고 원외처방약제비에 대한 손해를 병원과 공단이 절반씩(50%) 짊어지라는 깜짝 판결이 최근 나왔다. 서울고등법원 제15민사부는 백제병원 진료비 소송에서 “급여기준을 초과한 원외처방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현실과 괴리가 있다”며 “요양급여 심사기준의 모호성, 불합리성, 불투명성이 인정되고 병원 외에도 약사와 국가의 책임도 있으므로 병원 책임을 50%로 제한한다”고 판결했다.
같은 원외처방에 대해 그 타당성을 20%, 50%로 다르게 인정하자 병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물론 50% 승소가 향후 병원들의 진료비 소송에 긍정적인 근거이자 고무적인 판결로 사용될 수 있으나, 차이없는 원외처방에 있어 병원마다 다른 책임비율을 산정한데 대한 불공정성이 문제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50% 승소 판결이 결정된 이후 20% 승소가 확정된 병원들은 “진료비 환수 문제는 공단, 병원간 2자간 문제가 아니라 환자, 약국이 포함된 4자간 문제이므로 책임 또한 1/4씩 분담해야 한다”며 “또 정책적으로도 원외처방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하다”는데 입을 모았다.
같은 사안, 동일 재판부에서 격차가 큰 책임비율 승소를 결정한데 불만이 있다는 것이다. 진료비 소송은 아직까지도 선고될 재판이 많은 만큼 재판부의 법봉이 병원에 어떤 판단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례 2 : 신식 수술법 인정/불인정
진료비 소송 외 신식수술법을 놓고 재판부 간 상이한 판결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최근 고등법원은 원심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새로운 수술법의 환자 적용을 수용해 의사의 수술선택권 및 진료재량권을 근거로 병원 패소부분을 취소, 원심 대비 절반의 손해배상액을 선고했다.
서울고등법원 제17민사부는 척추 수술 후 반신마비를 겪은 환자가 병원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경성 수술법과 연성 수술법의 선택에 있어 의료진이 수술법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며 “1억원의 손해바상을 취소하고 5300만원만을 환자에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이는 신식 술기에 있어 1심 민사 재판부와 고등 재판부간 정반대의 판결을 내린 것으로 선례가 극히 드문 신식 수술법을 썼다고 해서 의료진의 죄를 물을 수 없다는게 고법 재판부의 판단이다.
판결을 두고 의사와 환자들은 “재판부가 의료의 특성, 전문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에 따라 판결이 뒤집힌 것”, “환자에게 수술승낙권을 줘야하는 것 아닌가?”, “환자 동의 없이 의사마음대로 수술법을 선택해도 된다는 것이냐”등의 엇갈린 반응을 보이는 상황이다. 법원의 상이한 판결이 의사와 환자간 혼란과 불신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례 3 : 뇌동맥류 ‘최선 수술시기’ 소송
의료계 내에서도 의견 갈등이 분분한 뇌동맥류의 최선 수술시기를 두고는 1심 민사 재판부와 2심 고등재판부는 물론, 최종 상급심인 대법원 마저도 각기 상이한 재판 결과를 선고하며 뒤집힌 판결을 내놨다.
뇌동맥류 파열 후 수술과정에서 사망한 환자 유족과 병원은 5년간 이어진 재판 기간 내 사법부의 판단만을 기다리며 선고 결과에 따라 울고 웃어야 했다.
이 사건에서 뇌동맥류 파열시 수술 적기에 대해 1심 민사재판부는 “뇌동맥류는 수술이 매우 어려워 철저한 수술준비가 필요했고 의료진의 과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유족측 패소를 결정했다.
2심 고등재판부는 1심을 뒤집었다 “파열시, 사망률이 20%에 달하는 뇌동맥류 수술은 가능한 빨리 시행해야 하는데 병원측이 5시간이나 지연시켜 환자를 사망케 했다”며 유족측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다시금 판결을 뒤집었다. “뇌동맥류 수술 시기는 의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므로 당장 환자 머리를 열어 수술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병원 책임을 묻는 것은 위법하다”며 패소판결을 파기해 사건을 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사건을 다시 재판하게 된 고법재판부는 최종적으로 의료진의 수술재량권 보호를 이유로 유족측 패소를 결정했으나 수 차례 판결을 번복한 사법부의 신뢰도는 이미 추락한 뒤였다.
법원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판결 위해 노력”
뒤집힌 판결은 단순히 해당 사건의 원고, 피고뿐만 아니라 앞서 이뤄졌거나 향후 심리될 수 천여건의 의료소송에 선(先) 판례가 되므로 그 파급력이 상당하다는 게 의료계와 대중의 시선이다.
항소심서 결과가 뒤집혀 유죄 판결을 받은 G대학병원 법무팀 관계자는 “의료사고 소송에 있어 법원이 때때로 온정에 치우친 판결을 내놓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며 “재판결과가 뒤집히려면 그럴만한 새로운 법적 쟁점이라던지 증거가 제시돼야 하는데 별다른 이유없이 유죄를 선고받게 돼 당황스럽다”고 피력했다.
이어 “같은 사안을 두고 1, 2심 법원 간 이견이 갈리는 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며 “재판부의 흔들린 판결이 의료계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고 덧붙였다.
S대병원 원무과 소송 담당자는 “승소를 위해 막대한 소송비와 시간, 인력, 행정력을 들이는 만큼 재판부 판결을 따를 수 밖에 없다”며 “3심제를 차용해 사용 중인 상황에서 사법부의 선고는 수용하거나 혹은 불복해 항소하는 방법 외엔 없는게 병원의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의료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의 판단 권한을 쥔 사법부는 법원 판결에 대한 국민 신뢰를 표명했다.
고등재판부 공보판사는 “모든 재판부는 법원에 제기된 소송들의 원고-피고측 변론을 충분히 심리한 뒤 사건의 전체적인 제반사정 및 변론의 취지, 사건과 관련된 여론 관심도 등을 모두 판단해 최종 선고한다”며 “원고-피고의 공평한 책임 및 공정한 재판을 위해 심사숙고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형사재판부 공보판사는 “때때로 법원 재판부의 판결이 왜곡돼 대중의 오해를 부르는 경우가 있지만 재판부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판결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의료소송의 경우 과실을 인정할 때 의사 등 전문 감정인을 선정해 진료기록 감정을 의뢰한다”며 “물론 감정 결과는 재판부의 판단에 구속력을 가지지는 않지만 사건을 심리하는 판사 본인이 부족한 의학적 전문지식에 대해서는 감정 의뢰 등을 통해 객관적 재판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의료계 차원 대응 방안 고심
대한의사협회 송형곤 대변인은 “사법부도 의료에 있어 전문가가 아니므로 재판부의 판단이 들어가게 마련인데 종종 법리적 해석에만 의존해서 국민적인 감성이나 정서에 기초해 병원측이 불리한 선고를 받는 경우가 있다”며 “진료비 환수조치를 예로들면 의료법이라는 틀 자체가 잘못된 측면이 있다. 30년 전 법안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며 그대로 이어오다보니 급격히 변화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송 대변인은 “낡은 잣대를 두고 법적으로 판단한다면 제대로 된 판단이 나올리 만무하지 않겠나”라며 “법원 재판부의 흔들린 판단이 지속돼 의료계와 환자들에게 혼선을 가져와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한병원협회 관계자는 “의료소송에서 패소하게 되면 병원측 위험성 및 타격이 크므로 이런 사례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차원에서 연수강좌를 개설하고 있다”며 “연수에는 의사, 병원 법제팀 등이 참여해 빈번한 의료분쟁에 대한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환자와 병원간 합리적인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이처럼 의료계가 환자와의 공감을 통한 분쟁 최소화에 힘쓰는 상황에서 재판부 판단이 흔들린다면 의료분쟁에서 병원-환자의 오해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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