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사태 이후 마취과 인력난으로 일선 대학병원 수술건수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마취통증의학과 전공의가 법적 처벌을 받게 되면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마취과 선배들은 “이번 판결이 젊은의사들 마취과 기피현상을 부추겨 필수의료 현장에서 수술대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마취통증의학회(회장 전영태)는 최근 데이트 폭력으로 발생한 뇌출혈 환자의 사망 사건과 관련해 마취통증의학과 전공의에게 배상 책임을 물은 판결을 강력 규탄했다.
응급 상황에서 환자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의료진을 폭행 가해자와 동일하게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의료행위의 본질을 무시한 처사라는 지적이다.
마취과는 환자 생명을 유지시키는 필수의료 분야임에도 이번 판결처럼 의료진에게 과도한 법적 책임을 부과하면 마취과 위축은 불가피하다는 우려다.
학회는 먼저 이번 사건에서 시행된 중심정맥관 시술의 경우 난이도가 높고 동맥천자 등의 합병증 발생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본질적으로 의사가 환자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고, 동맥천자가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의료사고’로 단정짓는 것은 의료행위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 판결이라는 지적이다.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을 의미하는 ‘공동불법행위’로 규정한 법원의 판시 내용에도 강한 반감을 나타냈다.
의료진이 아닌 환자의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를 공동불법행위자로 판단한 여러 의료사고 판례에 비춰보더라도 이번 판결은 납득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즉 데이트 폭력이라는 사고가 없었다면 치료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므로 의료진은 공동불법행위자가 아닌 피해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학회는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직접적 원인 제공자는 폭행 가해자이지 응급상황에서 치료에 나선 의료진이 아니다”라고 설파했다.
이어 “정당한 의료행위를 공동불법행위로 판단해 폭행 가해자와 동일한 책임을 묻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이라며 “부당한 판결은 결국 필수의료 붕괴를 단축시킬 뿐”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사법부는 응급의료 현장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합병증은 과실로 단정하지 않도록 법적 기준을 정비하고 의료과실과 불법행위를 명확히 구분하는 판단기준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앞서 대한마취통증의학과의사회(회장 윤장운)도 “필수의료 분야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판결”이라며 “마취과 의료진을 위축시키고, 필수의료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힐난했다.
의사회는 “응급상황에서 환자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한 필수 조치의 합병증까지 의료진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환자 생명을 살리려는 노력 자체가 위축될 우려가 크다”고 주장했다.
이어 “현재 의료진이 겪고 있는 법적 부담을 고려하지 않은 판결이 계속된다면 필수의료 분야를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광주고등법원은 최근 경막외출혈 등 상해로 내원한 응급환자에게 중심정맥관을 삽입하다가 사망사고를 낸 전공의와 대학병원 측에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특히 마취통증의학과 전공의와 데이트 폭력 가해자가 공동으로 손해 배상금 약 4억4000만원 및 지연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마취통증의학과 1년차 전공의였던 A씨는 2017년 10월 데이트 폭력으로 머리를 다쳐 응급실로 실려 온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료사고를 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해당 시술은 흔한 의료행위이지만 대상 신체 부위가 자칫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쇄골 근처였던 만큼 A씨가 최선의 주의 의무를 기울여야 했다고 판시했다.
또 중심정맥관 삽입 과정에서 주위 동맥을 1∼2㎜ 크기로 관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며 A씨와 병원이 유가족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