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료인이 의료법인 명의 뒤에서 의료기관을 개설 및 운영해도 탈법 정황이 포착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병원을 개설해 운영한 비의료인이 재산을 출연하거나 부당 유출하는 등의 탈법적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점이 확인되야 처벌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18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대법원 전원합의체(안철상 대법관)은 17일 의료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씨 상고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구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의사 자격이 없지만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의료기관을 운영 중이던 B의료재단 이사장 권유로 의료법인 설립을 제안받았다.
국내 의료법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의료법인 등이 아닌 자가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것을 제한하고 이를 위반하면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A씨는 제안을 받아들여 형식적으로 C의료법인을 설립하고 경상북도에서 허가를 받았으며, 설립 허가 다음날 A씨는 본인을 이사장으로 법인설립등기를 마쳤다.
이후 A씨는 B의료재단이 운영하던 요양병원을 인수받아 명칭을 변경하고 의료기관 개설허가를 받은 뒤 의사를 고용하는 등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A씨는 병원을 운영하던 중 요양급여비를 지급받기 위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요양급여비명세서를 제출했으며, 심사결과를 토대로 2009년 5월 6일부터 2015년 3월 24일까지 총 137억8526만원을 송금 받았다.
이 같은 사실들이 밝혀져 의료법 위반 등으로 기소당하자, A씨는 "실질적으로 의료법인을 만들어 운영했으므로 의료법 위반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적법한 절차로 의료법인을 개설했으며 의료법인 운영으로 개인적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며 “개인 영리 목적이 아닌 실질적으로 의료법인을 개설해 운영했기 때문에 의료법 위반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A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 법원은 “A씨는 형식적으로 의료법인을 개설하는 것처럼 외관을 가장한 뒤 실질적으로는 사익을 위해 개인 의료기관을 운영했다”고 밝혔다.
이어 “의료법인 이사와 감사가 모두 A씨 가족 및 지인들로 구성돼 실질적으로 A씨가 독자적으로 의료기관을 운영한 것”이라며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2심 역시 A씨를 유죄 판결했지만 1심 형량이 무겁다는 이유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A씨는 의료법인이 경영난을 겪을 때 개인자산으로 의료법인 채무 5억2000만원을 변제하고 의료법인 수입은 의료기관을 위해서만 사용했다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1심형은 너무 무겁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의료법인 공공성·비영리성 일탈한 구체적 사정 필요”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심리가 부족했다며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 다수의견(8명)은 "비의료인이 의료법인 명의 의료기관의 개설·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의료법인에 출연하는 것은 허용된다“며 ”의료법인 이사 지위에서 의사 결정 및 업무집행에 참여하거나 주도하는 것도 허용된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A씨를 처벌하려면 그가 병원 개설·운영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기본으로 하고 외형만 갖춘 의료법인을 탈법 수단으로 악용해 적법한 의료기관 개설·운영으로 가장했다는 사정이 인정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어 ”실질적으로 재산 출연이 이뤄지지 않아 실체가 인정되지 않는 의료법인을 의료기관 개설·운영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사정이지만 비의료인이 의료법인 재산을 부당하게 유출해 의료법인의 공공성과 비영리성을 일탈했다는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박정화·민유숙·김선수·이흥구·오경미 대법관은 "국민 건강을 보호·증진코자 하는 의료법의 입법 목적을 해치고 나아가 국민건강보험재정 건전성을 위협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 의견을 냈다.
이어 "다수의견이 세운 기준으로는 피고인 행위와 고의를 전체적·통합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고 개설자격 위반 인정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