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환자들은 아플 때마다 서울 생각, 정상인가”
이경수 영남대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교수(前 영남대학교 부총장)
2026.02.23 06:32 댓글쓰기

[특별기고] 새벽 첫 SRT 안은 오늘도 조용하다. 지방에서 암(癌) 진단을 받은 70대 어르신이 보호자와 함께 서울 대형병원으로 향한다. “자식들이 서울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권해 가보고 있어요” 짧은 한마디가 지금 한국 의료의 씁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건강보험 통계를 보면, 2024년 기준 서울에 살지 않는 약 600만 명의 환자가 서울 소재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이들이 서울에서 쓴 진료비만 11조 원에 이른다. 서울 의료기관에서 진료받은 환자 1503만명 중 623만명(41.5%)은 서울 이외 지역에서 원정진료를 온 환자였다. 세계 어느 선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현상이다.


여기에 지출되는 교통비, 숙박비만 4000여억 원이며, 서울 상급종합병원과 지역 국립대병원 간의 진료비 차이를 포함하면 순비용은 약 1조8000억 원에 이른다.


문제는 이것이 단지 환자들의 ‘서울 선호’ 성향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역에서 필요한 진료를 적시에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전국의 중증환자들이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구조가 굳어졌다는 신호이자 지역의료체계가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선택권’이란 이름으로 붕괴된 대한민국 의료전달체계


원래 우리나라 의료서비스는 1차·2차·3차 의료기관이 역할을 나누도록 설계돼 있었다. 감기나 고혈압 같은 가벼운 질환과 만성질환 관리는 동네의원과 보건소가, 입원 및 수술이 필요한 중등도 환자는 지역 종합병원, 고난도 수술과 중증·희귀질환은 상급종합병원이 담당하는 ‘전달체계’다.


이 체계 목표는 한정된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쓰면서 환자에게 필요한 수준의 진료를 적정한 곳에서 제공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의료전달체계는 “환자의 병원 선택권을 제한하는 규제”라는 이름으로 개혁 대상이 됐다. 진료권 규정은 느슨해졌고, 단계적 이용 원칙은 사실상 힘을 잃었다. 20여 년 동안 우리나라의 환자들은 “어차피 갈 수 있다면, 제일 큰 병원이 안전하다”는 학습 효과를 몸으로 체득했다. 의료전달체계를 걷어낸 자리에 남은 것은 전국에서 서울 대형병원으로 향하는 일방통행로뿐이었다.


서울 이외 지역 현실은 이 구조적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군 간 의료자원 불균형이 심화되어, 일부 군 지역에서는 분만실과 소아청소년과, 내과 전문의조차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같은 도에 살더라도 어느 시·군에 거주하느냐에 따라 심근경색·뇌졸중 등 응급상황에서의 골든타임 사수 가능성이 달라진다. 실제로 중증 응급환자를 1시간 내 적정 의료기관으로 전원할 수 있는 비율은 권역에 따라 2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와 보호자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더 멀고 큰 병원을 택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반복될수록, 역설적으로 지역의료체계는 더 빨리 무너져 내린다.


중앙 주도 ‘한 벌짜리 옷’ 정책, “3가지 혁신으로 바꿔야”


정부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역수가 가산, 지역 거점병원 육성, 지역의료 혁신시범사업, 의대 정원 확대 등 여러 대책을 쏟아내며 “언제, 어디서든 제때 치료받을 수 있는 나라”를 외쳤다. 그럼에도 지역 현장의 체감도가 낮은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정책이 여전히 중앙정부 주도 상향식 구조에 머물러 중앙에서 만든 ‘한 벌짜리 옷’을 전국에 억지로 입히고 있으며, 재정과 인력 투입이 단기 시범사업 중심으로 흩어져 있어 장기적인 설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책 성적표에 ‘지역완결성’과 ‘건강형평성’ 지표가 빠져 있다.


해법은 응급·중증·암·재활 등 주요 의료 여정을 환자의 생활권 안에서 완결하는 ‘지역완결형 의료체계’ 구축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혁신해야 한다.


첫째, 의료전달체계를 ‘규제’가 아닌 ‘시스템’으로 복원해야 한다. 의원·병원·상급종합병원의 기능을 재정립하고, 그에 맞는 수가·평가·인증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일차의료기관은 예방과 돌봄의 중심이 되고, 상급종합병원은 중증 진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둘째, ‘지역완결성’과 ‘건강형평성’을 핵심지표로 삼아야 한다. “이 지역 중증 응급환자 몇 퍼센트가 지역 내에서 치료를 마쳤는가”를 국가 지표로 삼고, 지역 거점병원과 네트워크 참여 기관에 성과에 따른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셋째, 지역이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정책 공간을 넓혀야 한다. 인구 감소 농촌과 산업도시, 초고령 어촌에 같은 처방을 내릴 수는 없다. 중앙정부는 기본 원칙과 재정을 책임지고, 구체적인 모델은 각 시·도 의료계·지자체·주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구조가 필요하다.


서울 vs 지방 구도 넘어, 공공인프라 재건 절실


지역의료 위기 논쟁은 종종 ‘서울 대 지방’의 대결 구도로 소비되곤 한다. 하지만 지역완결형 의료체계를 만드는 일은 서울을 ‘덜 좋은 도시’로 끌어내리자는 것이 아니다. 서울 대형병원이 희귀난치성질환 등 본연의 중증진료에 온전히 집중토록 돕고, 각 지역은 스스로의 응급·만성질환을 책임질 힘을 기르자는 뜻이다.


20여 년 전 우리는 의료전달체계를 ‘규제’로 보았고, 그 대가로 수도권 과밀과 지역의료 붕괴라는 혹독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이제는 의료전달체계와 지역완결형 의료를 도로나 철도처럼, 우리 모두의 삶을 지탱하는 ‘공공(公共) 인프라’로 다시 바라봐야 할 때다.


결국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아플 때마다 서울부터 떠올리는 나라로 남을 것인가, 아프더라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 사람답게 진료받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 것인가.” 이 질문에 우리가 어떤 답(答)을 내리느냐에 따라, 한국 의료 미래 30년과 우리 각자 노후 삶의 질이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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