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민식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사회는 조금씩 '저녁이 있는 삶'의 방향으로 바뀌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전반적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로'가 당연시 여겨지는 직업군이 있다. 바로 의사들이다. 개원의 등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노동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의사들은 특권층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어서 수입이 많은 만큼 희생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타파하고 '노동자'로서 의사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곳이 대한병원의사협의회(이하 병의협)다. 금년 1월말부터 의사노조가입 운동을 시작하며 의사노조 설립 본격화에 힘쓰고 있는 주신구 병의협 회장을 만났다.[편집자주]
Q.이전부터 의사노조 필요성에 대한 의견은 꾸준히 제기돼 왔는데 이 시점에서 의사노조 가입운동 등 적극적으로 의사노조 설립을 주장하고 나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당연지정제와 단일공보험체제로 인한 관치의료 시스템으로 인해서 대한민국에서 의사들은 직간접적으로 정부 통제를 받고 있다. 민간의료기관도 건강보험공단과 심평원을 통해 정부에 종속돼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의료 자율성에 심각한 제한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원가에 미치지도 못하는 수가를 감내하면서 과도한 노동에 노출돼 있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의사들이 처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와 맞설 수 있는 뚜렷한 수단이 의료계에는 없다. 지난 2000년 의약분업 투쟁 이후 의사들의 단체 파업은 불법이 됐기 때문에 단체 행동에 힘이 실리지 않고, 파업도 할 수 없는 힘없는 조직이 협상력을 제대로 갖추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런 상황이 고착화되면서 정부는 의료를 정치적인 논리로 이용하고 있었고 의사들은 패배의식에 젖어 대한민국 의료현실은 더욱 왜곡돼 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올바른 의료제도를 만들고 의사들이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서는 정부와의 협상에서 힘을 가질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의 의사회 중심 조직으로는 이러한 힘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지난 수 십년 의사회의 실패를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섭권과 파업권이 법으로 정당하게 보장되는 조직인 노동조합을 만들어 의사들의 힘을 모으고 정부에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Q. 의사협회 등도 있는데 병의협이 선제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병의협이 이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는 의사 직역 중에 사용자가 아닌 노동자로서의 가장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는 직역이 봉직의이기 때문이다. 의료기관에 고용돼 일하고 있는 봉직의들은 왜곡된 의료제도가 만들어낸 기형적인 시스템의 병의원 조직에서 각종 불합리한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봉직의들부터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봉직의 직역에서 노동조합 확산을 주도하는 것이 맞다고 봤다. 이를 발판으로 종국에는 개원의까지 포함하는 전체 의사노동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노동조합 확산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Q. 아직 초반이긴 하지만 실제 의사들 반응은 어떤지 궁금하다
의사들에게 노동조합은 아직 생소하기도 하고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등 기존 거대 노동조합 집단에 대한 거부감이 의료계 내부에 넓게 퍼져 있어 아직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병의협과 함께 의사노조 설립 사업을 같이 하고 있는 의료연대본부의 경우도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산하이다보니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의사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의사노조에 관심이 있는 의사회원들도 많이 있고 그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 실제로 병의협이나 기존 의사노조로 가입 문의나 도움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도 많다.
필요성은 인식하지만 노동조합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기존 의사 회원들에게 노동조합이 쉽게 받아들여 지려면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또한 새롭게 조직될 의사노조는 정치적으로 변질 되지 않고 순수하게 의사들 권익과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집단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병의협에서는 의료연대본부와 수 차례 회의를 통해서 의사노조 설립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 과정을 통해서 노동조합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과 오해를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회원들께 의사노조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가입을 독려할 계획이다.
"의사들 힘 모으고 정부에 정당한 권리 주장, 가입운동 속도 내서 산파 역할"
"왜곡된 의료제도 하에서 가장 많은 불합리한 환경에 처해 있는 직종이 봉직의"
"궁극적으로는 개원의까지 포함하는 전체 의사노동조합 설립 목표"
"의사노조는 정치적으로 변질되지 않고 순수하게 의사들 권익과 노동기본권 보장에 진력"
Q.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아주대의료원 등 일부 의사노조가 있긴 하지만 전체 의사 대비 소수에 불과하다. 지금껏 의사노조 설립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지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은 앞서 말했듯이 의사들이 기본적으로 정치 집단화된 기존의 거대 노동조합들에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노조 가입의 핵심 직역인 봉직의와 전공의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자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봉직의와 전공의를 개원의나 병원장이 되기 전 통과의례 정도의 직역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스스로를 사용자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점점 의료계 상황이 악화되면서 지금은 봉직의, 전공의 뿐만 아니라 의과대학 교수들도 스스로를 노동자로 자각하기 시작하고 있다. 마지막 이유로는 힘있는 의사노조를 조직화할 능력이 의료계 내부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전에도 의사노조를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고 실제로 의사노조가 출범한 적도 수 차례 있었다. 하지만 이전 의사노조들 대부분은 교섭권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면서 페이퍼 노조로 전락했던 것이 사실이다. 병의협이 의료연대본부와 의사노조 설립을 같이 추진하는 이유도 교섭권 있는 힘있는 의사노조를 만들어 이전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함이다.
Q. 사회적으로 의사, 간호사 등 의료계 종사자들에 대해서는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이 크다.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국민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는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이러한 인식이 생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의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의료계 종사자들은 어느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희생의 수준이 너무나 과도한 경우가 많다. 의료인에 대한 폭력을 안이하게 생각하는 일부 몰지각한 환자단체의 행태나 의사들의 과로를 당연시하는 풍조는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건전한 사회는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식으로 시스템이 운영되게 해서는 안 된다. 정당한 권리와 보상이 주어지는 환경이 마련돼 직업 윤리의 범위 내에서 용인할 수 있는 희생의 수준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무리한 희생을 정당화하는 풍조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의사도 노동자임을 알리는 노동조합 활성화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
Q. 작년 회장 취임사에서 불법 PA문제와 관련, 3개 병원서 출범한 의사노조와 공동대응 의지를 밝혔는데
의사노조 가입자가 늘어나게 될 경우 불법PA문제 뿐 아니라 여러가지 의료계 내외의 관련 현안, 당면 문제들에 목소리를 내고 구체적인 행동을 하게되리라고 생각한다. 정책제안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노조는 실제 행동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병의협과의 차이점이 될 것이다. 물론 병의협과 의사노조는 엄연히 다른 조직이고 병의협은 의사노조의 산파역할에 그칠 것이다. 의사노조가 자리를 잡아나가게 되면 의사노조 내부에서 노조원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해나가야 한다.
Q. ‘대한의사노조’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 것으로 안다.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
대한의사노조 구성은 개원의를 포함한 모든 의사직역(봉직의, 전공의, 전임의, 교수, 비전임교수)으로 만들려고 한다. 대한의사노조는 현재는 민노총 의료연대본부와 연대하여 시작하고 있으며 추후 조직원이 늘어나게 된다면 별도의 산별노조로 발전해 나갈수 도 있을 것이다. 이제 시작 단계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들은 진행해 가면서 확립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