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지난 2023년 한 해는 유독 의료계를 뒤흔든 법원 판결이 많았다.
한의사에게 진단용 의료기기 사용을 확대하고 필수의료 관련 고액 배상 판결이 잇따르며 의료계는 분노에 들끓었다.
한의사, 초음파·뇌파 진단기·골밀도 측정기 사용 '인정'
특히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인정하는 판결으로 의료계 위기감이 높아졌다.
2023년 9월 법조계는 의사가 초음파 진단기를 진료에 사용하는 것은 의료법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하며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 사용 법적 근거를 만들어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9부(이성복 부장판사)는 한의원에서 초음파 진단기를 이용해 진단 등 의료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한의사 A씨의 의료법 위반 혐의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초음파 진단기를 보조적으로 활용해 진료한 행위가 한의학적 원리에 의하지 않는 점이 명백하다거나 의료행위의 통상 수준을 넘어서는 보건위생상 위해가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 사용은 의료법 규정상 ‘한의사로서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다.
이는 작년 12월 대법원 판결 취지를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의료공학과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개발된 진단용 의료기기를 한의사가 사용하는 것이 ‘면허 이외의 의료행위’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려면 종전과 다른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라면서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에 돌려보냈다.
이어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을 금지하는 규정이 없고 한의사가 진단 보조 수단으로 쓰더라도 통상적 수준을 넘어서는 보건위생상 위해가 생길 우려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초음파기 뿐 아니라 한의사가 뇌파계나 엑스레이(X-ray) 방식의 골밀도 측정기를 이용해 진료하는 것도 합법이라고 판단했다.
지난 8월 대법원은 뇌파계 사용 후 면허정지 처분을 받은 한의사가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낸 면허자격정지 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뇌파계를 파킨슨병, 치매 진단에 사용한 행위가 ‘한의사로서 면허된 것 이외 의료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첫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수원지법이 엑스레이 방식의 골밀도 측정기를 환자 진료에 사용해 의료법 위반 혐의로 약식기소된 한의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봉침액에 국소마취제 ‘리도카인’을 섞어 환자에게 사용한 한의사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며 의료계 환호를 이끌어낸 판결도 있었다.
대한의사협회는 “일반의약품 및 전문의약품을 처방·조제하는 것은 한의사의 면허된 것 이외 의료행위에 해당한다는 사실에 대한 판결”이라며 “한의사들이 이번 판결을 숙지해 불법적인 무면허 의료행위를 이어가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길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대한한의사협회는 “봉침치료와 같은 한의치료 시 환자의 통증과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리도카인과 같은 전문의약품을 한의사가 진료에 보조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당연히 합법적인 행위”라며 “법원의 결정에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심장·분만’ 등 필수의료 소송 증가 추세에 잇단 '10억원대 고액 배상' 판결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의사에게 10억원대 고액 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결 역시 올해 수차례 발표되며 의료계를 압박했다.
지난 8월 서울고등법원은 심장수술 도중 대동맥 캐뉼라가 빠져 신생아에게 영구적인 발달장애 후유증이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의료진 과실을 인정하며 9억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의료진은 캐뉼라 탈락을 인지한 직후 다시 대동맥 캐뉼라 삽관을 시도하고 체외순환기 가동을 시행했으며 혈압 유지를 위해 약을 투여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했지만 환자에게 영구적인 인지장애 및 언어장애 등이 남게 됐다.
이에 법원은 “심장 수술 도중 대동맥 캐뉼라가 탈락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방지해야 하는 사고인데 이 사건은 좁은 수술 시야로 인해 예기치 못한 건드림으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의료진의 수술상 과실로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법원이 늑장 대처로 신생아에게 뇌성마비 장애를 입혔다며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12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도 있었다.
태동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은 임산부에게 간호사가 태동확인 및 분만 전 처치로 관장을 시행한 사건과 관련,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제1민사부는 “전문의가 태동확인에 직접 관여하지 않아 태아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적절한 조치 역시 늦어졌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임산부 내원 즉시 태아곤란증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의사가 직접 태아곤란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진료 및 조치를 이어갔어야 한다”며 “산모와 태아 상태를 계속 면밀히 측정·관찰하면서 즉각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도 이를 소홀히 했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올해 3월 출산 이후 과다 출혈로 뇌 손상을 입은 산모에게 병원이 1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환자 자궁적출술을 시행한 의료진은 수술 후 환자 혈압이 계속 떨어지고 맥박이 상승하자 다른 병원으로 전원 조치했다.
하지만 환자는 저산소성 뇌 손상 등을 진단받고 뇌 기능 손상으로 인지능력 저하 및 사지의 경도 마비, 보행 장애 등을 겪게 됐다.
이와 관련, 수원고법 민사2부는 “의료진은 대량 출혈을 확인하지 않은 의료상 과실로 자궁적출술과 전원 조치를 지연시킨 잘못이 있다”며 “또한 응급 상황과 그에 필요한 치료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 적절한 전원 치료가 지연된 원인을 제공했다”고 판시했다.
설명의무 위반을 이유로 의사에게 유죄를 내려 의료계 분노를 초래한 판결도 있었다.
코일색전술 도중 뇌동맥류 파열이 발생해 환자가 사망에 이른 사건과 관련, 재판부는 의사 처치상 과실은 없지만 설명의무가 불충분하다며 1000만원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8민사부는 “코일색전술 중 뇌동맥류 파열은 의료진 과실이 없어도 코일을 채워 넣거나 위치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다”며 수술과 관련된 의료상 과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법원은 “수술동의서 등을 살펴보면 진단명 및 수술법, 부작용 등에 대한 설명은 인정되지만 뇌동맥류 자연 경과 및 치료하지 않았을 경우 예후와 A씨 뇌동맥류 위치로 볼 때 수술 중 파열이 발생할 위험성이 높고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점 등은 충분히 설명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며 설명의무 위반을 지적했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2023 송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