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2] 일명 ‘사법의학’이 가뜩이나 어려운 대한민국 필수의료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사법의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과도한 법원 판결이 의료 현장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의료계 분위기를 반영하는 상징적 단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병원 진찰료 심사 기준이 불합리하다는 뜻인 ‘심평 의학’에서 따온 신조어다.
고의성 없는 의료사고에 대해 실형 및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이 잇따르면서 필수의료를 비롯해 현장을 지키는 의사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로 인해 환자를 살리겠다는 사명감 대신,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방어진료에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젊은 의사들도 필수의료를 선택지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외과 의사 등 10억 배상 판결, 필수의료 의사 씨 말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응급의료센터는 지난해 9월 ‘순환 당직 응급 수술’ 대상 질환으로 복막염을 추가 지정했다.
외과 의사의 ‘기본적 수술’로 통하던 복막염을 수술할 의사가 없어 치료 병원을 전국 단위로 확대한 것이다.
외과 의사라도 유방·갑상선처럼 본인의 세부 전공 분야만 진료하려는 분위기가 대세다.
그 이유로 의사들은 지난 2023년 법원 판결을 거론한다.
서울고법은 장(腸)이 꼬여 구토를 하던 생후 5일 된 신생아를 응급 수술한 외과 의사 등에게 “환자에게 1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이 병원엔 소아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소아외과 의사가 없었다. 소아외과 전문의는 전국에 50여 명 밖에 없다. 시간을 지체하면 아기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어 외과 의사가 응급 수술을 했다.
하지만 이 의사는 장 꼬임이 있는 아기는 맹장이 일반인과 다른 곳에 있고, 이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걸 모르고 수술을 끝냈다.
결국 아기는 심한 장기 손상을 입고 인지 저하가 왔다. 부모들은 “소아외과 의사가 아닌 외과 의사가 수술을 했다”며 거액의 소송을 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와 관련, 의료계는 “해당 판결로 마음 놓고 수술을 할 수 있는 외과의사는 더 이상 없다”며 “향후 발생될 모든 파탄의 책임은 오롯이 법원에 있다”고 힐난했다.
실제 의사들이 세부 전공에 맞는 환자만 받게 되면서, 응급 환자가 병원을 찾다가 상태가 악화되거나 심지어 숨지는 ‘응급실 뺑뺑이’가 속출하고 있다.
이처럼 법원 판결은 ‘방어 진료’, ‘필수과 기피’를 부르는 대표적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필수과 의사들은 부정적 뉘앙스를 담아 이를 ‘사법(司法) 의학’이라고 일컫는다.
응급의학·산부인과·소아과, 거액 배상책임 노출
소아과도 사법의학에 직격탄을 맞았다.
부산지법은 작년 1월 생후 45일 아기에게 설소대(혀와 구강 연결 부위) 수술을 한 소아과 의사에게 13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수술 후 지혈 등을 의사가 하지 않고 간호조무사에게 맡기는 과정에서 아기가 장애를 얻게 됐다는 이유였다.
소아과 의사들은 “소송이 겁나서 적극적인 치료를 점점 못 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법원 판결은 응급실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2023년 말 흉통을 호소하며 응급실에 온 환자의 대동맥 박리(대동맥 안쪽 혈관 손상)를 발견하지 못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응급실 의사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사고 당시인 2014년 이 의사는 전공의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레지던트 1년 차였다.
작년엔 환자의 폐암 징후를 조기 발견 못 했다고 응급실 의사와 병원에 17억원 배상을 선고한 판결도 나왔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이번 판결이 우리나라 응급의료의 붕괴와 응급의료 종사자들의 이탈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산부인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수원지법 평택지원은 작년 5월 “병원의 분만 잘못으로 아기가 뇌성마비를 얻었다”며 소송을 낸 산모의 손을 들어주면서, 병원이 12억원을 물어주라고 선고했다.
산모 측은 “당시 태동이 약하다고 말했는데도 병원 조치가 늦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병원 측은 “조치가 늦은 게 아니라 분만에 필요한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다소 걸렸던 것 뿐”이라고 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아기 한 명 받아서 10만원 벌다가, 소송 걸리면 1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며 “법원 판결이 산과 기피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탄했다.
실제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작년 산부인과 레지던트 4년 차 등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이 중 47%는 ‘분만을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의료 사고 발생 우려’(79%)였다.
특히 과도한 배상 판결은 필수의료의 몰락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뇌성마비 신생아 분만사고 12억원, 폐암 치료 지연 17억원, 심장수술 후 영구 발달 장애 후유증 9억원 등 거액의 배상 판결이 잇따랐다.
신생아를 바닥에 떨어뜨려 의식 불명에 빠지게 한 ‘아영이 사건’의 경우 병원 측이 부모에게 손해배상 및 위자료 명목으로 9억4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응급실 내원 환자의 호흡상태가 위험하다고 판단해 기관 삽관을 시도한 의료진에 대해서도 5억7000만원의 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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