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마음이 굉장히 편합니다. 우리 기술이 해외에 나가면 통할 수 있을지 불안했는데 직접 미국에 가보니 경쟁업체보다 기술력이 우위에 있고, 수요도 충분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국산 1호 시술로봇 '에이비아' 개발자인 서울아산병원 의공학연구소 최재순 교수[사진]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10년 결실을 앞두고 초조하게 했던 요소들이 걷힌 만큼 표정은 밝았다.
한국은 로봇 사용이 가장 많은 나라지만 정작 제조 강국은 아니다. 의료 분야 로봇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미국 인튜이티브서지컬의 '다빈치' 시리즈는 전세계 수술로봇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하며 사실상 독점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밖에 치료 목적의 의료로봇 분야도 미국, 독일, 중국 등이 앞서가고 있다.
이 가운데 최재순 교수가 대표를 맡고 있는 병원 내 창업 기업 엘엔로보틱스의 에이비아가 지난 달 첫 심혈관중재시술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수술로봇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정확도 높이고 시술시간 줄이는 등 장점 극대화
이번에 에이비아가 활용된 경피적 관상동맥중재술은 협심증이나 심근경색 환자의 관상동맥 협착 부위를 넓혀 주는 시술이다.
사타구니 대퇴동맥이나 손목 혈관을 통해 카테터를 심장 관상동맥까지 삽입한 후 좁아진 관상동맥에 풍선을 진입시켜 혈관을 넓히고 스텐트를 펼쳐 넣는다.
인공 심폐기 사용을 통한 개흉수술에 비해 위험도가 낮고 신속하게 심근경색을 치료할 수 있으며, 전신마취나 피부 절개가 필요하지 않아 회복 기간 및 입원 기간이 짧다.
다만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장비를 미세혈관에 집어넣어 진행되는 시술인 것에 더해 관상동맥에서 나타나는 병변이 환자마다 다르고 복잡해 숙련된 의료진의 술기가 필요하다.
에이비아는 이 같은 시술의 정확도를 높인다. 에이비아는 의사의 손에 해당하는 핸들 부분과 컴퓨터로 구성됐다.
의사는 컴퓨터 영상을 보고 수술 부위를 파악하면서 조이스틱과 같은 핸들을 조종해 환자의 관상동맥 내 목표 병변까지 유도 철사를 넣은 뒤 혈관 확장을 위한 풍선과 스텐트를 진입시킨다.
핸들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1mm씩 오차 없이 이동한다.
최재순 교수는 “에이비아를 이용하면 밀리미터 단위로 원했던 길이만큼 정확하게 삽입할 수 있다. 이번 시술에서 에이비아를 사용한 의료진이 가장 놀랐던 점이기도 하다”라고 전했다.
에이비아 컴퓨터 영상은 시술시간과 조영제 사용량도 크게 줄였다. 특히 조영제는 시술 중 혈관이나 조직을 관찰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독성 때문에 양을 최소화하는 게 중요하다.
에이비아는 조영제가 투입됐을 때 영상을 캡처해 조영제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혈관 구조를 보여준다. 혈관 구조가 심장 움직임에 따라 변해도 그 움직임을 계산해 혈관을 변형해 나타낸다.
선두기업 사업 철수, 기술 경쟁력 확인 계기
에이비아는 지난 2월 국산 1호 수술로봇으로 식약처 승인을 받으며 큰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위기가 닥쳤다. 혈관중재시술로봇 시장에서 가장 앞서있던 독일 지멘스가 사업 철수를 선언한 것이다.
지멘스 헬시니어스는 지난 2019년 미국 혈관중재시술로봇 기업인 코린더스를 11억달러(약 1조3400억원)에 인수했다.
그러나 올해 5월 "심장수술에 코린더스 로봇을 사용하는 것은 수 년은 족히 더 걸릴 것"이라고 실망감을 표하며 사업 중단을 발표했다.
선두 기업이 발을 뺀다는 것은 시장 전체의 전망이 어둡다는 것을 반증하는 경우가 다수다. 최 교수의 휴대전화도 불이 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이 시장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왔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가슴이 철렁했다. 미국의 지인들에게 물어가며 코린더스의 상황을 수집해 나갔다”고 전했다.
코린더스는 지난 2019년 인수된 뒤 판매실적 저조와 고객 불만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최 교수는 “코린더스는 2020~2022년 연간 매출이 200억 남짓에 머물렀고, 인수 후 분위기가 영업 중심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기술 개발이 더디다 보니 고객들의 불만이 이어졌다”고 전했다.
특히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시술도구의 제한과 햅틱 기능 미비가 기술적 문제로 지적됐다.
그는 “채널이 2개밖에 없어 복잡한 시술에 못 쓴다는 문제가 있었다. 또 시술자의 손에 아무런 느낌이 전달되지 않다 보니 의사들이 불만족스러워 했다”고 말했다.
이어 “반면 에이비아는 4개의 채널로 갖춰 복잡한 시술에도 적용이 가능하고, 햅틱 기능 탑재해 시술 중 미세한 감각을 실제 손으로 느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막대한 투자가 이어지는 중국 경쟁업체 역시 이 같은 기술력에 있어 에이비아가 앞서 있다고 판단했다.
최 교수는 “중국 혈관중재시술로봇은 아직 예전 기술을 사용하고 있어 국제적으로는 경쟁력이 없다”고 말하면서 “심혈관뿐만 아니라 뇌혈관에 대한 시술에서도 코린더스나 중국 기업들 로봇은 사용이 어려운 수준이지만 우리는 조금만 최적화하면 충분히 사용 가능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미국 진출 등 관상동맥중재술 패러다임 변화 주도"
이 같은 판단 아래 엘엔로보틱스는 11월부터 미국 시장 진출을 본격화했다.
최재순 교수는 “대리인을 고용해 11월 1일자로 미국 내 사업을 시작했다. 첫 사무소는 시애틀에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내년 첫 매출을 시작으로 2025년 하반기 미국 FDA 승인, 2026년 하반기에 유럽 수출에 필요한 CE 마크 인증 획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내년에 미국 존스홉킨스대와 공동연구가 예정돼 있으며, 스탠퍼드대와도 공동연구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해외 진출이 가시화되면서 추가 투자유치 활동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그는 “올해 2월 식약처 허가 이후 동남아 국가와 중동 등에서 투자 관련 문의가 잇따랐다"며 "투자사도 20곳 이상에서 연락이 오는 등 고무적이다. 조만간 신규 투자자들을 만날 예정”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