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병원 교수가 바라보는 안타까운 '암환자 정책'
강정훈 교수(경상대병원 혈액종양내과)
2020.01.07 10:42 댓글쓰기

[특별기고]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픈 진료실에서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예전 어느 날 압박골절로 인해 허리가 다 꼬부라진 할아버지 한 분이 항암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왔다. 호중구 수치가 턱없이 낮아 곧바로 항암치료를 할 수 없으니 1주일 뒤 다시 방문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 제가 남해 집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세 시간 걸립니더. 정말로 창피한 얘긴데요 버스 탈 때는 기어서 버스에 올라갑니다. 한 번 오기가 너무 힘든데 웬만하면 주사 맞고 가면 안되겠습니까라고···.

할아버지가 진료실을 나간 뒤에 의사로서 매일 환자를 본다고 하면서도 정작 진짜 환자의 힘든 점은 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여기이자 필자의 근무지이기도 한 경남지역암센터는 경상남도 진주에 있다. 서울에서 오려면 버스나 KTX로 편도 3시간30분 이상 걸리는 지방 도시다. 하지만 도서벽지에 살며 대중교통에 의지하는 시골 어르신들에게는 이 곳 진주까지 오는 것조차 힘겨운 여정이다. 하물며 서울까지 통원하며 치료를 받는 환자, 특히 암환자들 고생이 어떻겠는 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필자가 업무 차 서울을 다녀 보면, 약한 몸을 이끌고 많게는 수십회 넘게 이 먼 길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들 의지가 대단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소위 서울 5대 메이저병원 근처에 거주하는 환자와 남해 외딴 섬에 사는 환자가 똑같은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육체적사회경제적 비용은 후자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가정 호스피스 등 새로운 정책, 지방 및 도서벽지 실정 고려하지 않아 답답" 
 
그러나 이런 지방 환자들의 고충이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서 고려되는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다
. 일례로 20186월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가정 호스피스 확대 방안을 살펴보겠다. 이 안()에 따르면 말기 암 환자가 병원이 아닌 가정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정형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가 올해부터 정식으로 도입된다. 호스피스기관 의료진이 해당 환자의 집을 방문해 진료를 하면, 방문 횟수에 비례해 수가가 지급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진주 경상대학병원에서 시행하는 것은 언감생심, 쉽지 않은 일이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도시 환자들과 달리 시골 환자들은 넓은 지역에 드문드문 거주하고 있어 환자 1인당 방문에 드는 비용이 훨씬 큰데도, 방문 1회당 지급되는 수가는 똑같다. 병원 집행부에서 제도 추진에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처럼 새로운 정책에는 시골에 사는 암 환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녹아 있지 않다. 이 안을 추진한 사람들에게는 지방 환자들은 도시 환자들과 같은 진료를 받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한 번도 들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차이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곳의 문제까지 고려할 여력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답답함에 가슴이 먹먹하다

정책 입안자의 무지의 소치든, 아니면 정책 대상자의 우선순위에서 시골 환자들이 밀려난 것이든 간에, 필자에게 정책을 설계하는 사람들에게 도서벽지 같은 시골 환자들은 별로 중요치 않구나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에 물적인적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시골 방방곡곡에 커다란 병원을 세우는 건 실상 현실성이 없다. 지방의 상급종합병원에서 모든 산간 벽지에 의사를 파견할 때까지 수가를 무작정 인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건소·보건진료소 활용, 암환자 치료·돌봄 효율성 높일 수 있고 도농(都農) 의료격차도 완화 가능"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 과연 없는 것일까? 사실 이런 불평등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사안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체계적인 지방 의료조직이 존재한다. 도시 사람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할 수 있는 보건지소보건진료소가 바로 그것이다.

 

1980년 도농(都農) 간 의료 격차를 줄이기 위해 농어촌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된 후 전국적으로 의료취약지에 보건진료소가 설립됐다. 설립 초기 이들은 지역의료 최전 선에서 보건의식 제고와 기초 의료서비스 제공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40년이라는 세 월이 흐르는 동안 길이 없던 곳에 큰 도로가 나고, 농촌의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의사들 간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면() 단위 지역에도 대부분 병의원이 자리했다. 이처럼 초기 설립 목적이 달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조직 자생력 덕분인지 보건진료소는 근 20년 간 전국적으로 1,900개에서 거의 줄어들지 않은 채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들 기관의 역할을 폄훼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극심한 고령화가 진행된 시골 마을에서 보건진료소는 존재 자체로도 복지기관 역할을 하며, 자녀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실제로 보건진료소장에 대한 시골 노인들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또 지금도 지방 보건진료소장들은 과거 일차의료 업무를 의료건강증진사업으로 대체해 나가는 등 나름대로 시대 변화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업들은 그 실적을 정량적으로 평가하기 어렵고 범위도 모호해서 보건진료소장 개개인의 역량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쯤 되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이 조직들의 역할을 중증질환자 돌봄으로 전환한다면 앞서 제시된 문제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암 환자는 질환 특성상 병원에서의 치료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귀가 후에도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하다. 항상 가까이에서 환자를 살피며 문제가 생기면 조기에 대처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미 시골 환자들과 신뢰 관계가 형성돼 있고, 또 지근거리에 존재하는 보건진료소 만큼 이 역할에 안성맞춤인 조직이 또 있을까 한다. 물론 이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 암센터가 보건진료소장들에게 충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또 적절한 의학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필수적이다.

보건진료소와 지역암센터가 연계해 네트워크를 형성해 환자에 대한 돌봄 안전망을 구축한다면, 의료취약지 환자들의 건강권을 보장한다는 보건진료소 설립 취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동시에 도농 간 의료격차를 크게 완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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