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달래기식 정책이 오히려 해악(害惡)으로 작용하고 있다. 의료 개혁은 백년대계(百年大計)인 만큼 장기적 안목을 견지하며 신중하게 추진돼야 한다.”
장장 1년째 대한민국 의료 지축을 흔들고 있는 ‘의료대란’과 ‘의료개혁’이라는 모순된 화두에 대해 병원계 수장이 쓴소리를 던졌다.
대한병원협회 이성규 회장은 최근 기자간담회를 갖고 의정사태 이후 전개되고 있는 정부의 각종 의료정책에 대해 기대보다는 우려를 표했다.
이성규 회장은 “갑작스러운 의정사태 이후 병원들은 여전히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정책은 의료계는 물론 전국민을 힘들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특히 의대증원과 의료개혁 기치로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활성화를 내걸었지만 해당 진료현장은 오히려 점점 처참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의정사태 이후 제시되고 있는 다양한 의료정책 대부분이 임시방편적 성격이 짙어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오히려 의료시스템에 악영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우려했다.
대표적으로 인력에 대한 지원금 문제를 짚었다. 실제 정부는 의료대란 사태 해결을 위해 응급의학과를 비롯한 필수의료 진료과 의료진에 대해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성규 회장은 “과연 언제까지 이 막대한 지원금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만약 정부 지원이 중단되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병원들 몫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정 직역과 직능에 대한 인적 지원체계는 오히려 의료현장의 교란만 초래하게 될 것”이라며 “거시적 관점에서 수가 정책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전반적 수가인상을 통해 의료기관이 적절한 의료기능을 유지할 수 있고, 불필요한 갈등이 초래되지 않는 균형 있고 지속가능한 수가정책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지원사업에 이어 추진 중인 2차 병원 육성 및 지원정책 방향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의료서비스 질(質) 제고 차원에서 경쟁력 있는 병원들을 중심으로 지원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지역의료를 책임지고 있는 지방병원들이 고사 위기에 내몰릴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다.
그는 “2차 병원 육성 및 지원정책에 선택받지 못한 지방병원들은 정책 역차별로 인해 그나마 수행해 온 지역의료 명맥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급하게 추진하기 보다 5년 이상 긴호흡을 갖고 신중하게 정책을 설계해 나가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의료현장 목소리를 수렴하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의정사태 장기화 속 우후죽순 발표·추진 정책 우려”
“5년 이상 긴호흡 통한 의료정책 설계와 현장 목소리 수렴하는 노력 필요”
“대학병원 무한경쟁‧중복투자, 지역의료 생태계 위협”
“대학과 중소병원이 각자 소임에 충실할 수 있는 의료전달체계 정립 시급”
“전문의 기근, 인력기준 한시적 완화 시급”
야심차게 출발했지만 비상계엄 사태 이후 급격히 동력을 상실한 의료개혁특별위원회와 관련해서도 실무진 회의는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만큼 제대로 된 개혁을 당부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로는 주저없이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꼽았다. 세부적으로는 대학병원들의 무한경쟁 및 중복투자로 지역의료 생태계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성규 회장은 “얽힌 실타래와 같은 국내 의료전달체계를 바로잡는 정책이 절실하다”며 “건전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는 칸막이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학병원과 중소병원이 각자 소임에 충실할 수 있는 의료전달체계 정립이 시급하다”며 “지금과 같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지방 중소병원들은 버티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의과대학 증원과 관련해서는 교육현장의 수용 가능성을 감안한 점진적 추진을 제안했다.
그는 “의과대학과 수련병원 교육 역량을 감안해 과학적 추계와 이해관계자의 충분한 의견수렴을 통해 합리적이고 점진적인 증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료인 양성 정책은 질병양태, 생활수준, 고령화, 워라벨 등 여러 요소를 감안해야 한다”며 “단순한 수요와 공급법칙을 적용할 경우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의대생과 전공의 이탈로 신규 의료진 공급이 사실상 멈춰버린 상황을 감안, 한시적으로라도 의료인력 활용에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성규 회장은 “전문의 인력난이 완화될 때까지 관련 규제나 각종 지정기준 및 평가지표 등을 일시적으로 유예하거나 완화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매년 3000명 정도 배출되던 신규 전문의가 올해는 566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며 “각종 제도의 인력기준 탄력 운용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이 외에도 건강보험 수가체계의 획기적 개선을 통한 적정 보상과 의료사고 등에 대한 안전망 구축, 취약지 의료지원 등도 시급한 현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작금의 난국 타개를 위해 조속한 시일 내에 의료계와의 허심탄회한 논의를 통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길 고대한다”며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협회는 의대생과 전공의들의 조속한 복귀 여건 마련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병원 경영 개선을 위한 정책 사업에 주력하면서 안전한 진료환경 구축에 힘쓸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