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원은 흡연과 폐암 사이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담배회사는 사고를 내고 도망간 뺑소니범과 같다"며 대법원 상고 의지를 분명히 했다.
서울고법 민사6-1부(부장판사 박해빈·권순민·이경훈)는 15일 건보공단이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심과 같이 원고 패소 판결했다.
법원 "건보공단 대위청구·개별 인과성 모두 배척"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직접 청구'와 '대위 청구' 논리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 공단의 손해배상 청구 권원에 대해 재판부는 "공단의 보험급여 지출은 국민건강보험법이 예정한 바에 따른 의무 이행일 뿐"이라며 "이를 피고(담배회사)의 위법행위로 인한 손해가 아닌, 보험계약에 따른 지급으로 봐야 하므로 법률적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공단은 주위적 청구가 기각될 경우를 대비해, 치료비를 지출한 보험자로서 피해 환자들의 권리를 대신 행사하는 '예비적 청구(대위청구)' 카드도 꺼내 들었으나 이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
특히 최대 쟁점이 된 '흡연과 폐암 간 인과관계'에 대해 재판부는 엄격한 입증 책임을 요구한 기존 대법원 판례를 재확인했다.
재판부는 "개인이 흡연했다는 사실과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증명됐다고 해서, 곧바로 양자 사이의 개별적 인과관계 개연성이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법적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개별 환자의 흡연 시기와 기간, 폐암 발생 시기, 평소 건강 상태와 생활습관, 질병 상태의 변화, 가족력 등 제반 사정을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며 단순히 통계적 역학적 상관관계만으로는 개별 소송에서의 인과성을 추정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정기석 이사장 "年 4조원 건보재정 누수, 담배회사는 뺑소니범"
판결 직후 정기석 공단 이사장은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정 이사장은 법원의 판단이 국민 건강권과 의학적 현실을 외면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 이사장은 "담배회사는 막대한 수익을 챙겨가는데 정작 그로 인해 병든 국민들은 병실에서 신음하고 있다"며 "매년 폐암 환자가 4만 명 발생하고 2만 명이 사망하는데, 법원이 유해성에 대해 유보적인 판단을 내린 것은 비통한 일"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특히 담배회사를 '뺑소니범'에 비유하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정 이사장은 "교통사고를 내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운전자가 도망가 버린 형국"이라며 "사고를 낸 운전자는 담배회사고, 그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공단은 연간 3조~4조원이 넘는 급여비를 지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만약 담배로 인한 지출(약 4조원)이 없다면 건강보험료를 매년 4~5% 가량 절감할 수 있다"며 "선진국들은 '담배 없는 세상'을 향해 가는데 우리나라는 경제만 선진국일 뿐, 국민 건강 보호 측면에서는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소세포암 98%는 흡연 탓…의학적 인과성 인정해야"
이번 판결 쟁점이었던 '인과관계 입증'에 대해서도 정 이사장은 의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반박했다.
그는 "소세포암의 경우 98%가 흡연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이 의학계 정설이자 역학적 자료로 증명된 사실"이라며 "대상 환자 3465명 중 상당수가 이미 사망했는데, 이들의 병이 담배 때문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억지"라고 주장했다.
또한 1960~70년대 흡연자들의 '자유의지' 논리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당시에는 담배의 유해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흡연자들이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중독됐다는 것이다.
정 이사장은 "2002년 작고한 코미디언 故 이주일 씨도 '담배가 이렇게 해로운 줄 몰랐다'고 호소했다"며 "담배회사는 유해성을 알면서도 은폐했고, 국민들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됐다. 이제 와서 개인의 선택이었다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무리한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공단, 대법원 상고 예고…새로운 법리 개발 주력
건보공단은 이번 2심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할 계획이다.
정 이사장은 "비록 오늘 판결은 아쉽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라며 "의료계, 법조계 전문가들과 협력해 상고이유서를 철저히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공단 측은 향후 대법원 상고심에서 ▲중독성 입증 자료 보강 ▲과거 담배회사의 유해성 은폐 정황 제시 ▲피해자 심층 면접 등을 통해 기존의 역학적 인과론을 넘어서는 개별적 입증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정 이사장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 그리고 담배회사의 책임을 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우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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