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사실은… 남자 친구와 잔 적이 있어요." 한양대병원 소화기내과 이항락 교수는 얼마 전 배가 아프다며 찾아온 20세 여성 환자에게 성 경험 여부를 물었다. 그녀는 배가 아파 동네의원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지만 별 이상을 발견하지 못해 대학병원까지 찾아온 터였다. 산부인과도 비뇨기과도 아닌 소화기내과 의사가 왜 '민감한' 사생활을 물었을까?
이 교수는 "최근 젊은 여성들 중에서 성관계 중 감염된 세균에 의해 골반염이 발생, 간까지 감염돼 배가 아프다며 소화기 내과를 찾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간을 캡슐처럼 싸고 있는 막에 염증이 생긴 '간주위염'은 국내에서 지난 2005년 대한소화기학회에 사례가 보고 될 정도로 드물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젊은 간주위염 환자를 한 달에 한 명 이상 진료하고 있다.
간주위염은 주로 골반염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을 때 생긴다. 성관계 때 옮긴 임질균이나 클라미디아 등의 세균이 자궁내막, 난관, 골반 등을 감염시킨 뒤 혈액, 림프선을 통해 간을 둘러싼 막까지 옮긴 것이다.
간주위염은 간 세포나 조직에 염증이 생기는 간염과는 달리 간 피막에 염증이 생긴 것으로 간 내부에는 침범하지 않아 대부분 간 효소 수치는 변화가 없다. 증상은 배 오른쪽 윗부분을 손으로 누를 때 심한 복통이 나타나거나, 기침을 할 때나 누웠다 일어날 때, 숨쉴 때 날카로운 통증이 발생한다.
한강성심병원 소화기내과 고동희 교수는 "골반염 환자의 5~30%에서 간주위염이 생기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드물게 남성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지만 주로 젊은 여성들에게 잘 나타난다"고 말했다.
골반염의 주요 원인은 ▲성관계 때 콘돔을 사용하지 않거나 ▲월경 기간 중이나 직후에 성관계를 하는 경우 ▲성관계 파트너가 여럿인 경우 ▲세균성 질염이 있는 경우 ▲자궁 내 피임장치, 임신 중절 등이 꼽힌다.
순천향대병원 산부인과 이임순 교수는 "골반염은 60% 이상이 증상이 뚜렷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골반염에 걸린 줄도 모르고 넘어간다"고 말했다. 골반염은 무디면서도 지속적인 하복부 통증이 나타나는데, 생리통 등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을지대병원 소화기내과 양현웅 교수는 "간주위염이 진단되면 특별한 증상이 없더라도 골반염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