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사람마다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고, 특정한 말이나 단어를 피하는 개인적 금기어도 있다. 외사씨 기록에 의하면 정조 임금은 어린 나이에 뒤지 속에서 죽어가는 아버지(사도세자)를 눈 앞에서 봤다. 그래서 평생토록 '효(孝)'라는 단어를 꺼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항상 사용하는 말인데도 그 뜻의 적절성이나 의미를 모른 채 무심코 사용하는 일도 많다. 의사와 관련해서 일반 국민도 흔히 알고 있지만 그 말의 기원과 동기가 불분명한 것이 "의사는 환자 때문에 존재한다",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의사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족쇄가 돼버린 명제"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을 의사들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철칙으로 규정하고 이를 어기는 의사를 패륜범 대하듯 한다. 정확한 의미도 잘 모르는 비논리적 명제가 이제는 의사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족쇄가 돼 사회적으로 무소불위(無所不爲) 위세를 부리고 있다.
이 말의 기원은 의사 역할이나 삶의 철학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의 뜻을 담고 있었을 법한 말인데, 시대 변화에 따라 의미가 엉뚱하게 퇴행한 듯하다.
오늘날 이 말이 의사들 입을 틀어막고, 팔다리를 묶어 놓고,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하는 추악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의술(醫術)은 생명을 다루고 인(仁)을 실천하는 귀한 것'이라는 의미로 추측되는 이 말의 퇴행적 변화는 의사를 공격하는 좀비(zombie)와 같은 존재가 됐다. 때로는 의사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덫이 되고, 발목을 잡는 멍에로 전락하고 더 나아가 입을 틀어막는 망으로 퇴화됐다.
국가 권력은 의사들을 옥죄일 필요가 있을 때마다 이런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빌미로 그물의 벼리를 아주 쉽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래서 의사들은 과연 내가 이 나라 국민인지? 이렇게 몰매를 맞아야 할 이유가 뭔지? 의사인 나는 자유인인가, 노예인가? 의사 원죄는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격정을 토로한다.
그런 측면에서 정부의 일방적 권력 행위는 인권유린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환자 때문에 먹고 살아가는 의사가 환자 곁을 떠나다니,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라는 근본적인 철학을 망각한 패륜적 행위다. 당국은 이런 자들을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
의료계와 정부 충돌 여파가 의사의 파업 등 사회적인 문제로 파급되면 언론은 의사를 질타하는 기사로 도배를 한다. 여기에 시민들은 전후좌우를 따져 볼 겨를도 없이 벌 떼처럼 달려든다. 이런 현상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변함이 없다.
"저항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 국가 권력은 의사들 주장 무시 다반사"
의사는 자기 주장을 말과 글로서 발표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 매몰되는 것이다. 의사들 건의에 대해 국가 권력은 코웃음을 치며 사실상 무시해 왔다.
필자가 이 두가지 명제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철학적이고 선언적 의미가 담긴 그 내용이 잘못됐거나 왜곡됐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의사는 환자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당연한 듯하다. 그러나 인류 사회에서 한 인격체가 또 다른 어떤 인격체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격의 형평성을 부정하는 패륜이다. 상대에게 빚을 지며 의존적으로 존립하는 삶은 사람이 아니고 노예라는 말이다. 이 말은 철학적 논리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돼야 한다.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다." 이 말이 품고 있는 뜻은 매우 철학적이다. 함부로 의미를 확대, 축소 해석해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의학교육 현장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철학과 윤리의 지혜를 전하는 형이상학적 훈육 지침에 해당하는 말이다.
엄중한 철학이 담겨 있는 듯한 이 말이 오늘날 의사들을 옥죄는 족쇄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다"라는 말을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명제의 한가운데 있는 의사들조차 그 정확한 의미나 기원을 대부분 모르고 있다.
과학을 공부한 의사와 실천적 철학인 유학의 근간에 해당하는 인(仁)이라는 사상이 접목된 것은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말의 생성 과정에 매우 강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유학에서 말하는 인술(仁術)은 덕(德)을 행하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본성이고 우주 삼라만상의 실질적인 본체이며 영원 무변한 진리의 본질이 인(仁)이고 이를 행하는 것이 인술(仁術)이다.
논어 안연(顔淵) 편에서 인(仁)의 본질에 대한 공자 대답은 '자기를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예(禮)란 세상의 질서(秩序)를 의미한다. 인(仁)에 대해 아주 많은 말씀을 남긴 공자의 어록 어디에도 인(仁)과 의(醫)를 연관하여 남긴 말은 없다. 즉 유학의 본질에 나타난 말 중에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라고 직접 언급된 구절은 없다는 것이다.
의사학(醫史學)을 전공한 이효진 박사 연구를 보면 조선 중엽까지 인술에 대한 개념은 오로지 덕을 베풀고 행하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즉, 인술에 대해 유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 조선 중엽 이후 역사에 의술과 인술을 직접 접목한 흔적은 없다. 그러나 의술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좋은 의미의 인술에 해당되는 것이라는 막연하고 확대된 개념이 중국 고대로부터 일부 존재하여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조선말 1910년대에 현대의학을 공부한 의사들의 존재가 주목받으면서 생존에 위협을 느낀 한의사들이 공생 병존 수단으로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다”라는 개념을 차용하기 시작했고, 현대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현대의학의 토착화를 위해 1930년대부터 서양의학을 공부한 의사들도 이 말을 좋은 의미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이효진 박사 이외에 의사학을 연구한 많은 학자가 동의하고 있다.
필자는 이 말에 대한 유교 문화권인 중국 상황을 알기 위하여 chatGPT에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중국에서도 의술은 인술이라는 말을 사용하나?’ 대답은 이렇다.
‘의술은 인술이다라는 말은 주로 한국에서 의술 본질과 의사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이 문구는 의술(의학적 기술)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구하고 도와주는 인술(인간적인 기술)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존재합니다. 중국 전통 의학에서도 의사들이 환자를 도울 때 인술을 중요시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의술은 인술이다라는 표현이 중국에서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의술은 덕행이다.(醫術是德行) 또는 의술은 인심이다.(醫術是仁心)와 같은 표현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 모두 의술에 대한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접근을 중요시하지만 그 표현 방식이나 구체적 문구는 다를 수 있습니다.’
"윤리적·실천적 의미 담은 철학이지만 이런 의술 펼칠 수 있는 사회적 환경 준비가 선(先)"
이상의 chatGPT 대답을 유학적으로 유추하면 의술은 인(仁)과 덕을 실천해서 천지간(天地間)에 예(禮)를 구현하는 귀중한 행위라고 생각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즉 의술이란 의사 개인이 갖추어야 할 윤리적 책임과 덕행이고 의사들이 인술을 펼칠 수 있는 상황적인 문제까지 책임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술은 인술이다”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의사는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라는 윤리적 덕목을 갖추고 이런 의술을 펼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준비돼야 한다. 그래야 환자들에게 인술이 행하여지고 이는 예(禮)라는 세상의 질서가 형성된다는 의미다. 즉 이 말은 의사를 억압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의사가 의술을 통해 인을 실천함으로써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볼 때 의술은 인술이라는 말은 아주 존귀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현대의학을 공부하는 의사들도 새겨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실천적 철학이다.
그러나 백년도 안되는 짧은 역사를 갖고 출처도 불분명한 이 말이 의사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패륜 의사로 낙인을 찍는 형국으로 오용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의사의 철학적 덕목으로 수용할 수 있지만 이것이 곧 의사들의 사회적 책무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권력층이 전가의 보도처럼 의사들을 압박하는 수단이 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퇴행하여 차용되는 이 말이 의사들에게 노예와 같은 저항 불능의 굴종적인 삶을 강요하고 있다. 이렇게 강요하는 사회적 관습은 한국의 많은 의사들을 소진(burn out)시키고 있다.
"젊은 의사들은 의사이기 이전에 대부분 자연인·자유인 삶의 철학 정서"
한편 오늘의 젊은 의사들 마음에는 자신은 의사이기 이전에 자연인이고 자유인이라는 올바른 삶의 철학이 강하게 내재하고 있다. 이는 자연적이고 순리적인 변화다.
호주 심리학자이며 수십 년간 임상의사들을 코칭하고 명상 지도를 해온 세리 존슨(Sharee Johnson)은 그의 저서 The Thriving Doctor(잘나가는 의사의 비밀)를 통해 Doctor first(의사 우선)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의사가 최고라는 천박하고 이기적 말이 아니다. ’의사는 자신을 위해 투자하여야 한다. 자신을 돌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좋은 의사가 될 수 있고, 그것은 결국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의사의 삶이 환자 우선에서 의사 자신을 우선으로 하는 삶으로 패러다임을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환자에게 지속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의사로서 삶에 대한 철학의 변화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고, 의사가 소진(burn out)되고 있는 현재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해야 한다. 의술은 살신성인(殺身成仁) 도구가 아니다.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라는 말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하고, 의술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 사용해야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