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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매년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 민주국가에서 호국보훈의 정신을 가슴에 담고 생활하는 것은 국민 덕목 중 하나다
. 그러나 바쁜 일상 속에 이를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그렇기 때문에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특정해 이 한 달만이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자는 뜻으로 생각된다.
우리의 근·현대사에 있어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6월은 호국보훈의 달에 걸맞는 역사적인 사건이 집중돼 있다.
6월에 집중된 호국보훈 역사
6월 1일은 법정기념일인 의병(義兵)의 날이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 공께서 의병을 창의한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다. 정부는 2010년부터 이날을 의병의 날로 정해 그 고귀한 뜻을 되새기고 있다.
6월 6일은 6·25 전쟁 후인 1953년 현충일로 정한 날이다. 이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다만 6일로 정한 것은 그 당시 6일이 24절기 중 9번째인 망종(芒種)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망종의 망(芒)자는 ‘까끄라기 망’자이고 종(種)은 ‘씨 종’자다. 종자의 겉에 붙어 있는 까끄러운 털을 뜻하며, 이런 까끄러운 털을 갖고 있는 곡식의 낱알 즉 ’보리와 벼’를 지칭하는 날이다.
농경사회였던 과거에 이 날을 전후해 보리를 수확하고, 벼를 심어야 한 해 농사가 풍년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 날이다. 아울러 우리 선조들은 망종 날이면 조상님들께 제사를 올렸다. 이러한 배경이 6일을 현충일로 정한 큰 이유로 알고 있다.
6월 10일은 1926년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해 전국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을 벌인 날이다. 3·1 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만세운동이었다. 현대사에 이르러서는 1987년 6·10 민주항쟁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6월 25일은 잊을 수 없는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날로서 피아간에 전체적으로 138만명의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 뼈 아픈 날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국민,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이 날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전쟁 발발의 원인과 진행 과정조차 잊혀지거나 왜곡돼 가고 있어 가슴이 아프다.
감독의 의도대로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한 편의 영화를 통해 편향된 시각으로 겨우 이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걱정이다.
6월 29일은 제2연평해전의 날이다.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29일 불법 남침한 북한 경비정의 기습 포사격으로 해전이 발발했다.
이 해전으로 우리 해군에서는 윤영하 소령, 한상국 상사, 조찬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현 병장 등 6명의 용사들이 전사했고, 19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참수리고속정 1척이 침몰했다. 북한 측 피해 상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 해전 이후 정부가 취한 애매모호한 태도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선공후사(先公後私) 평가는 후세의 몫
이렇게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은 우리의 역사적 사건들과 맥락을 같이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정한 게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매년 6월에 정부는 물론 많은 민간 기업에서도 애국선열들을 위한 많은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참 바람직하며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금년은 우리 민족이 암울한 일제 강점기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되찾은지 75주년이 되는 해다.
정부는 잃었던 나라를 되찾고,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키는데 이바지한 수 많은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후대에 귀감으로 삼고자 예우를 마련하는 보훈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의병의 뚜렷한 기원은 임진왜란 때에 창의한 의병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근대사를 기준으로 볼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구국운동의 시작은 125년 전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기점으로 일어난 을미의병(乙未義兵)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난극복을 위해 선공후사(先公後私)와 위국여가(爲國如家)의 정신으로 공헌하신 수 많은 호국열사들을 기리고 있다.
임진왜란 의병사(義兵史)는 기록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었기 때문에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비교적 자세하고 긍정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광복 이후에 발생된 사건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유공자 평가에 있어 계량화가 비교적 원활한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 비록 우리를 탄압하기 위한 저들의 기록이나마 일부는 역설적으로 유공자 평가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애국지사들의 세세한 행적들은 기록 주관자가 일제였던 관계로 대부분의 기록이 누락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료의 불충분으로 국가 유공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분들이 허다하다.
특히 이런 현상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을 위해 위국헌신(爲國獻身) 하신 의사(醫師)로서의 애국지사들도 마찬가지다. 후학 입장에서는 선각자분들을 이렇게 홀대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 속 한곳에 허전함이 있고 하늘에 죄를 짓는 기분이 든다.
일제강점기 때의 상황이 이 정도임을 고려해볼 때 을미의병을 기점으로 한 항일운동에 이바지하신 분들의 기록은 역사적 의의와 행적에 비해 일천(日淺)하기 이를데 없다.
당시 조선왕조는 기울어져가고, 국가의 실권은 친일 매국노들과 일제들이 강점하기 시작한 때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모든 항일의병은 역적패당으로 치부될 수 밖에 없었다.
호국보훈, 증빙자료 문턱 낮춰야
이런 정황을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항일의병에 참여했다는 어떤 증명서가 있다면 그것은 애국증명서가 아니라 당시를 기준으로 볼 때 역적증명서에 해당하는 서글픈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항일의병 활동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가 절대 금기였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하나의 증빙서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누가 얼마의 항일의병 군자금을 냈다든가, 어느 곳의 누가 의병에 동참했다 하는 기록을 찾아 항일의병 활동을 입증하는 것은 지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일제에 의해 투옥됐거나 순절한 분들의 기록만이 분명한 사실로 인정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가보훈처에서 객관적 증빙자료에 근거해 국가유공자 서훈대상을 선정하다 보니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의 자랑스런 족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국에서는 객관성과 근거 중심의 평가를 위해 증빙자료를 요구하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이 같은 요구는 당연하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된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평가 방법에 아쉬움이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는 분들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부분적 기록과 구전을 통해 전해져 오는 항일의병 참여자에 대한 확실한 증빙자료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과거에 수록된 단 한 줄의 기록이라도 그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기록은 명망 있는 선비들이 평소에 기록해 두었던 자료를 후손들이나 제자들이 문집의 형태로 출판한 게 거의 전부이다. 여기에 수록된 단 한 줄의 기록이라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선비들의 기록은 올곧고 강직한 선비정신이 그대로 깃들어 있는 것으로서 최고 지성인의 진실한 기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비나 학자의 문집에 기록된 제3자의 애국헌신 또는 항일의병에 대한 내용은 국가유공자 선정 기준에 긍정적인 자료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많은 분들의 공적이 재평가 받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항일의병에 참여했으나 기록 부실과 자료의 불충분으로 국가 유공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유림(儒林)뿐 아니라 의료계 다수의 선각자들이 제대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대한의사협회를 중심으로 의사로서 애국하신 분들의 자료를 새롭게 발굴하기 위한 연구 조사단을 발족해 애국선열들의 뜻을 새기고 합당한 예우를 국가에 건의하는 게 후학들의 도리다.
광복 75주년 및 을미의병 125주년의 해인 2020년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훌륭한 우리 선조들의 큰 뜻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기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건의서를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