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66년 혼돈의 역사 종지부···괴로웠던 의사들
의료인 책임 전가에 공분···내부고발·시술거부 등 상처만 남긴 세월
2019.04.12 12:13 댓글쓰기
[데일리메디 한해진 기자]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1953년 제정된 낙태죄가 66년 만에 폐지될 전망이다. 낙태 허용 범위나 건강보험 적용 등 사회적 협의가 요구되는 과제가 산적하지만 여성단체 뿐만 아니라 의료계에서도 헌재의 결정을 환영했다. 지난 2009년 젊은 산부인과 의사 700명이 낙태시술을 전면 중단하겠다는 ‘양심선언’을 한 이후로 10년 만에 상당한 변화를 이뤄낸 셈이다.
 
낙태시술 거부, ‘양심선언’
 
2009년 10월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진오비)’은 전국의 산부인과 병의원을 중심으로 낙태근절운동을 위한 프로라이프 의사회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병원에서 이뤄지는 불법 낙태시술 건수에 비해 처벌 받는 의료인이 지나치게 적다"며 낙태시술을 없애기 위해서는 의사들에 대한 합리적인 양형 기준을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단체는 불법낙태 근절을 목표로 종합대책안을 마련하고 자정운동을 선언하며 실제로 각지의 병원 수 곳을 불법낙태로 고발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소수의 의견이 모든 산부인과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며 “사회적 합의가 요구되는 문제를 산부인과의 범법행위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행보를 계기로 의료계 내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논의가 진전되지는 못했다.

모자보건법 개정을 통해 낙태 허용 사유를 규정하거나 사후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는 등 세부적인 사안에 대한 대책은 여러 가지 언급됐지만 주제의 무게감 탓인지 합의점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애꿎은 의사들만 처벌”
 
찬반 여론이 팽팽한 가운데 보건복지부가 2010년 ‘불법 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비혼 한부모에 대한 지원을 비롯해 콜센터를 바탕으로 불법 시술이 이뤄지는 병원에 대한 단속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산부인과 의사들을 잠재적 범죄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사회적 배경은 고려하지 않고 현행법을 앞세워 의료인들을 처벌하는 데만 급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지부 정책이 계기가 된 것은 아니지만 실제 산부인과의사회 우려대로 병원과 의사들을 처벌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갔다. 2011년에는 부산 지역 보건소가 불법 낙태시술이 의심되는 의료기관을 고발하기도 했다.
 
마침내 낙태죄에 대한 첫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6주된 태아를 낙태시킨 혐의로 기소된 조산사가 형법 270조 1항(동의낙태죄)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청구인 측은 낙태죄가 이미 생명력을 다한 법 조항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었지만 헌재는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결정문을 통해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인정돼야 한다”며 “낙태를 처벌치 않거나 형벌보다 가벼운 제재를 가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낙태가 만연하게 될 것”이라고 봤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하는 업무에 종사하는 자가 태아 생명을 박탈하는 시술을 한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도 크다”고 밝히기도 했다.



 
“범죄자 취급 그만”
 
헌재의 합헌 결정 이후 잠시 소강 상태를 맞았던 의료계 내 낙태 논란은 2016년에 이르러 또 폭발했다.
 
복지부가 낙태를 비롯해 의료인의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자격정지 처분을 최대 1개월에서 12개월로 늘리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을 발표한 게 문제가 됐다.
 
이와 함께 이듬해에는 의사 A씨가 낙태죄 처벌 조항인 형법 269조 1항(자기낙태죄)과 270조 1항(동의낙태죄)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해 논쟁에 불이 붙었다.
 
의료계는 “더 이상 의사를 범죄자 취급하지 말라”며 개정안의 비현실성을 지적했다. 복지부가 낙태에 대해 자격정지 12개월을 1개월로 변경한 개정안을 발표했지만 해당 고시 철회를 요구하며 낙태수술 전면 거부를 선언했다.
 
의사회 측은 “여성의 건강권 보호와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산부인과 의사들 또한 양심적 의료행위로 인한 원치 않는 위법행위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취지”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시민단체까지 가세해 강하게 반발했다.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 도입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결국 복지부는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한 결정이 나올 때까지 의사들에 대한 처분을 유예하겠다고 밝혔고, 마침내 지난 11일 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산부인과 의사는 환자 및 임산부의 치료자”라며 “여성의 건강권 확보를 위한 헌재의 이번 판결이 단순위헌 결정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쉽지만 불합치도 잘된 결정”이라며 환영의 뜻을 보였다.
 
이미 OECD 국가 중 대부분은 낙태를 허용하고, 미국, 영국은 1970년대인 50년 전 낙태 허용 후 의사를 처벌하지 않고 있다.

의사회는 “이번 헌재의 판결로 모자보건법 개정이 불가피해졌다. 앞으로의 법률 개정 방향은 낙태 허용 사유와 범위가 될 것"이라며 "건강보험 적용 여부와 비용 산정 등도 쟁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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