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대한민국 의료가 무너지고 있다. 정부의 돌발적인 의대증원 발표 이후 대학병원을 겨우 지탱하던 전공의와 전임의 들은 마치 썰물 빠져나가듯 병원을 빠져나갔다.
밖에서 보일 틈없이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병원을 지키며 노예처럼 일하던 그들이었다.
나의 경우를 돌아본다. 의사면허를 딴 후 1년간의 인턴 수련을 돌아보면, 참으로 비참하고 혹독한 시간이었다.
끼니를 거르고 오버 타임 근무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 소변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리기도 했고, 생리대를 갈 시간이 없어 가운에 묻은 피를 가리고 다녔다.
"기피과인 바이탈과를 지망하자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만류"
인턴 수련을 마치고, 과를 결정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본교 졸업생에 평판도, 성적도 좋았던 내가 소위 기피과인 ‘바이탈과’를 지망하자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날 뜯어 말렸다.
앞으로 네 인생에서 하게 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선택은, 전공과를 정하는 것과 배우자를 고르는 것이라 했다. 선배는 내게 왜 굳이 힘든 걸 자초하냐고, 왜 이리 고집을 부리냐고 핀잔을 줬다. 하지만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난 그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바이탈과를 같이 쓰기로 했던 동기는 피부과로 돌렸고 나는 고민 끝에 1년을 쉬기로 했다.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수많은 힘든 위기 상황을 버텨내려면, 확실한 명분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다른 선택지를 과감히 포기할 준비를 하고 싶었다.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이후 쉬면서 로컬에서 ‘일반의’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봤다. 미용, 요양병원, 대진 등 가리지 않았다. 내가 선택하지 ‘않을’ 다른 일들을 몽땅 경험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련받을 때보다 몸도, 마음도, 통장 상황도 훨씬 편하고 행복했다. 처음으로 부모님께 비싼 식사 대접도 하고 해외 여행도 다녔다. 참으로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쉬던 당시, 정말 충격적으로 느껴진 광경이 있었다. 평일 낮에 카페와 공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의 환하고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고민 끝에 1년 쉬면서 병원 밖과 안은 180도 다른 공간이라는거 느껴"
다들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나와 내 동료들은 왜 병원 안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살았나 싶었다. 병원 밖과 안은 180도 다른 공간이었다. 환한 햇빛 아래 속상해 한참을 멈춰있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딜까, 고민이 되었다.
쉬면서 느꼈던 행복의 맛은 아주 강렬했다. 어쩌면 바이탈 뽕보다 더했다. 세상을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도 있구나 싶었다. 행복했던 그 1년이 지나자 또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나는 고민 끝에 아수라장 같은 ‘수련 현장’으로 자진해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당시의 나는,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면서도 얻고 싶은게 있었다. 나는 당장의 안락한 삶보다 타인의 생명을 구해내는 능력있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살면, 피로하고 힘들더라도 인생이 가치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나를 포기할 작정으로 돌아왔다. 전적으로 개인 가치관에 따른 선택이었다.
"수련 명목하에 청춘 바치며 밤낮없이 노 젓던 젊은의사들 사라지자 의료 민낯 드러나"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붙들려, 청춘을 바치며 밤낮없이 노를 젓던 어린 의사들이 사라지자 대한민국 의료 민낯이 수면 위로 그대로 드러났다.
대학병원들이 수십억원의 적자로 파산 위기에 몰리며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배우는 과정의 수련생들이 사라지니, 의료 전체가 멈추는 아이러니한 광경이 펼쳐진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당시의 나는 왜 ‘바이탈 현장’으로 돌아왔는가. 그리고 얼마 전(前) 떠난 어린 의사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시간을 되돌린다면 과연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당시 ‘행복의 맛’보다 가치있게 느껴졌던 바이탈 의사로서의 보람을, 작금의 의료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게 맞을까.
의업(醫業)을 포기한 채 쉬고 있는 어린 개인들을 겁박하고 명령하고 수치를 주는 것이 과연 떠난 이들을 돌아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인가. 현 사태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문제들을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