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줄고 직원은 나가고 힘드네요'
2010.04.06 21:41 댓글쓰기
“미래 불안하다며 떠나는 후배 못 붙잡아”

[기획 3]3년 전, 서울시 서초구에 산부인과를 개원한 A모 원장(46). 마음 편한 봉직의로 남으라는 동료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긋지긋한 월급쟁이 생활에 염증을 느껴 과감하게 개원을 택했다. 젊은 산모들이 분만의사로 여성 전문의를 선호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분만은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았다. 처녀막을 재생하는 이른바 이쁜이 수술, 레이저 질성형 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더욱이 부인과 질환에서 능력 있는 의사로 평가받아 왔다. 임대료가 부담되지만 장기만 잘 살리면 해볼만 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A 원장은 오래전부터 눈 여겨온 후배 2명을 데리고 개원할 당시만 해도 2년 안에 자리를 잡을 것으로 확신했다. 거금을 들여 홍보대행사와 계약도 하고 직원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인테리어도 여성들이 좋아하는 분위기로 공들여 꾸몄다. 산부인과가 아무리 힘들다지만 전문화, 특성화로 승부하겠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실제로 성형외과 못지않게 잘나가는 선배를 여럿 봐왔다. 그 선배들은 환자가 많았다고 한다. A 원장은 “아무리 저출산 시대라지만 산부인과도 상위 10%는 살아남는다”며 “진료에 자신 있었고, 수없이 개원 이후를 그려왔기 때문에 실패는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밤낮으로 진료실을 떠나지 않았지만 개원 첫 해에 임대료와 직원 급여를 제외하고 나니 3500만원이라는 돈을 손에 쥐었다. 솔직히 돈 되는 시술을 받는 환자가 생각보다 적었다. 상담은 꾸준히 있는데 실제 진료로 이어지는 횟수가 적었다. 입소문 효과도 생각보다 적었다.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후배를 달래느라 고급 횟집을 예약했다. A 원장은 “개원 초에 예상한 경영실적이 절반 수준에 불과해 나 자신도 많이 놀랐다”며 “나만큼은 다를 것이란 기대감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후배한테는 잘 될 거라 애써 애둘렀다”고 했다.

그 후로 2년이 지난 지금 대출금은 고스란히 남았다. 이자만 근근이 갚아나가는 실정이다. 그러던 사이 후배 1명은 “미래가 불안하다”며 병원을 떠났다. A 원장은 “생각보다 냉혹한 개원가 현실을 체험한 후배가 힘들다고 말하는데 잡을 수 없었다”며 “정말 잘할 자신이 있었는데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대출금 갚을 생각에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병원 운영이 부진한 원인이 무엇인지 골몰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산모들은 갈수록 젊은 여의사를 선호했다. 더욱이 크고 브랜드가 명확한 병원을 더욱 찾고 있다. 당초 수익을 발생시킬 것으로 여긴 시술은 입소문을 기대하기 어렵고 경쟁도 너무 심했다. 냉정하게 판단해 보니 대출금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그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있다.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주의에 산부인과 의원이 더 생겨났다. 여의사에게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까 걱정이 생겼다고 그는 고백했다. A 원장은 산부인과 진료만으론 병원 운영이 어려워 최근 비만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관련 학회와 연수강좌를 기웃거린 지 반년이 넘었다고 한다. A원장은 “얼마 전 조간신문에 국내 합계출산율이 전 세계 최하위 수준이라는 보도를 봤다. 여건은 더욱 열악해지는데 수가라도 현실적으로 올려줬으면 좋겠다”고 씁쓸해했다.

“울고 싶은 성형외과 의사도 많다”

“성형외과 전문의라면 기름기 많고 적은 노력에 큰돈 번다는 인식이 의사들 사이에서도 확연하죠. 잘 나가는 성형외과는 소수지만 그들이 전체로 비치는 것은 어쩔 수 없죠. 울고 싶은 성형외과 의사도 많아요.”

서울 압구정동에서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이모 원장(44)은 최근 고향 충청남도 천안시에 성형외과를 개원하기로 했다. 성형의 메카로 각광받는 압구정동은 경쟁이 치열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망하는 곳이 생겨났다. 조금만 방심하면 환자를 뺏기는 피 말리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병원을 정리하면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가 천안시를 택한 것은 서울과 비교적 거리가 가깝고 틈새시장이 충분하다는 판단에서다. 부모님을 모실 수 있다는 점도 주요했다. 지방 성형외과는 입소문이 빠르기 때문에 초기 이미지가 승패를 가린다. 때문에 공들여 피부 관리를 하고 친절교육도 따로 받았을 정도였다. 이모 원장은 “주요 고객인 젊은 여성들에게 어필하고자 개인적인 투자를 많이 했다”며 “시술비용도 서울보다 15% 이상 저렴하게 책정해 가격경쟁력이 충분했다”고 말했다. 인테리어도 서울 못지않게 꾸며 자신감이 컸다고 했다.

개업 첫날 환자 10여 명이 상담을 받았다. 일주일도 안 돼 주부들이 삼삼오오 상담을 받았다. 이런 식이면 빨리 자리를 잡을 것으로 기대감이 생겼다고 했다. 인터넷 카페도 개설해 고객관리에 만전을 기했다. 문제는 상담환자는 계속 느는 데 반해 실제 시술로 이어지는 횟수가 적다는 점. 이모 원장은 “환자들이 결국 우리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서울에서 시술을 받는 현상이 계속됐다”며 “환자들은 막상 지방에서 성형수술을 받는 것을 꺼렸다”고 한숨을 지었다.

서울 병원에 대한 지역민의 막연한 동경을 온몸으로 느꼈다고도 했다. 그는 급기야 시술비용을 더 내렸다. 쌍꺼풀 비용이 100만원도 안 됐다. 덤핑공세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처지였다. 원가수준에 시술을 해도 우선 환자를 많이 보고 입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지역신문에 광고도 했다. 그런데 반짝 효과뿐이었다.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이후여서 가족에게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다고 이 원장은 고백한다. 그는 지난 1~2월 총 15건 내외의 시술을 집도했다. 그마저도 마진이 적은 쌍꺼풀이 대부분이어서 실속은 없었다. 병원 운영에 기여도가 큰 가슴이나 턱 시술은 원하는 환자는 대부분 서울로 갔다.

더 큰 문제는 팀워크가 중요한 수술방 간호사를 구하는 일이었다. 서울에선 몰랐는데 지방에 내려와 간호사 구인난을 온몸으로 체험한 셈이다. 이 원장은 “적지 않은 급여를 책정했지만 맘에 드는 간호사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며 “수술방 경험이 있고 상담업무에도 능한 간호사는 대부분 서울에서 근무하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는 “환자도 적었지만 직원 구하는 일이 더 고민이었다”며 “솔직히 성형을 받고 싶다는 환자가 많은데 왜 이렇게 외면받는지 모르겠다”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방 중소병원장이 담배 다시 피운 사연

경상남도 경주시에 150병상 규모의 종소병원을 운영하는 김모 원장(57)은 한숨을 쉬는 일이 많아졌다. 문제는 명확했다. 지역에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환자가 줄어드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직원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김 원장은 “지방 중소병원장들의 공통적인 고민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며 “지역 공동화 현상은 지역 의료계, 특히 중소병원의 해결되지 않는 숙제 같다”고 했다.

그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게 된 것은 애지중지했던 의사 3명이 연속으로 사표를 제출한 이후부터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의사들은 자식교육을 이유로 속속 떠났다. 아끼던 학교 후배라 상실감이 컸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운영하지 않은 산부인과는 이해해도, 병원 운영을 떠받드는 재활의학과와 정형외과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고민이 더 커졌다.

김 원장은 “중소병원이 삼중고를 겪는다고 하는데, 지방으로 내려오면 4중고 5중고는 예삿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간호사 구하기도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고 김 원장은 하소연한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간호사 정원을 채우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만두는 간호사가 많아도 금세 지원자가 나타나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서울 선호 현상이 두드러진 데다 인근 대도시에 대형병원이 속속 생겨나면서 간호사 수급에 차질이 생겼다. 합격 통보를 해도 병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일이 많았다.

병원 내과는 한때 외래가 100명을 넘을 때가 많았다. 최근에는 그 절반 수준이다. 대신 정형외과와 재활의학과가 입소문을 탔지만 의사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는 재활의학과 전문의 연봉을 2억원으로 책정했지만 예상보다 지원자가 적었다.

김 원장은 “지방 대형병원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살만하지 않느냐”며 “인근 대도시에 대형병원이 병상을 늘릴수록 환자가 감소하는 게 눈에 보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방 중소병원은 구인난과 환자감소, 인근 대형병원이라는 환경 속에 샌드위치 신세에 불과하다”고 푸념했다. 서울에서 분점을 낸 전문병원의 등장도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얼마 전 지역 중소병원장이 모여 저녁식사를 함께 했는데 다들 어렵다는 이야기만 하다 헤어졌다.

김 원장을 좌절하게 하는 또다른 이유는 사정이 나아질 것이란 기대감을 품기 어렵다는 점이다. 30대 중반 의원으로 시작해 병원으로 성장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시절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을 뿐이라고. 김 원장은 “한 때는 중소병원 살린다고 국회 토론회도 많더니만, 이제는 그런 할리우드 액션마저 사라진 상태”라며 “환자들이 크고 좋은 병원 좋아하는 건 이해하겠지만, 굳이 멀리서 진료받고 경제적 부담을 지는 모습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 희망으로 리모델링을 고민 중이다. 투자비용을 회수할 수 있을지 고민이지만, 문 닫는 병원을 볼 때마다 욱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고 김 원장은 전했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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