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에게 과연 왕년은 있었나?
2009.07.05 22:10 댓글쓰기
사례1 오랜 봉직의 생활을 접고 강원도에 의원을 개원했다 실패한 내과전문의 A씨. 그는 경쟁이 치열한 수도권을 피하려고 강원도를 택했지만, 장밋빛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A씨는 절치부심 서울에 재개원을 했다. 힘겨운 은행 문턱을 넘어 의원을 새로 열었지만 그는 가끔 황당한 경험을 해야 했다. 진료를 받는 환자가 문득 “난 오리지널 약 아니면 곤란하다”고 말했기 때문. 잊을만 하면 처방에 오리지널 약을 강조하는 환자가 나타났다. 인터넷을 통해 의료지식을 습득한 젊은 환자에게서 이 같은 경향이 많았다.

사례2 응급실 당직을 서던 레지던트 3년차 B씨. 그는 응급실 근무를 설 때면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진료 순서를 기다리지 못해 고함을 지르는 일부 환자와 보호자에게 폭행당한 아찔한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체격이 건장한 한 남성 환자는 그에게 집기를 집어던지며 폭언을 쏟아부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의사 생활에 회의가 들어 진료에 집중하지 못한다. B씨는 “나이가 30살도 훌쩍 넘었고, 가끔 내가 왜 의대를 선택했을까 고민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의료계 내부적으로 의사의 권위가 사라졌다는 자조 섞인 말들이 많아지고 있다. 좋은 시절을 보낸 선배를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젊은 의사에게서 이 같은 목소리가 더 크다. 중년층은 중년층대로 수입 감소와 환자와의 갈등으로 고민이 깊어지고, 청년층은 개원을 보장받기도 어려운 환경에 불만이 쌓여간다.

의사들의 고민·불만은 세대와 지역, 진료과별로 차이가 있고, 경제적 보상이 적어진 젊은 의사에게 두드러진 경향을 보인다. ‘의사=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지위’라는 공식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의사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과거 의사들은 의대 졸업 후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면 확실한 수입이 보장되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직업군으로 각광받았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의료원장은 “과거 의대가 몇 개 안 되던 시절에는 의사의 수입은 확실했지만, 시대가 변하다보니 젊은 의사일수록 불만이 많을 수 있다”며 “더 중요한 문제는 의사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저하됐다는 점이다. 이 점은 젊은 의사들이 해결하고 노력해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진료공간 폭력 무방비 교수도 예외 없어

최근 들어 의사 집단 내에서 가장 우려하는 부문 중 하나는 폭력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 폭언 수준이 아닌 폭행, 심지어 살인에 이르는 강력범죄의 표적이 되는 경우 종종 발생한다. 대한병원협회 등 의료단체가 정부기관에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등 집단적인 움직임에 들어간 것도 문제의 심각성을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 시발점은 충남의 한 의대교수가 치료결과에 불만을 품은 환자로부터 피살당한 사건이었다. 당시 의료계는 우려를 나타내며 강력한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올해 들어 잇달아 의사의 피살 사건이 발생해 의료계가 경악했다. 지난달 5월 광주광역시 한 종합병원에 근무 중인 40대 여의사가 길을 걷던 중 괴한에게 테러를 당했다. 여의사는 칼에 목을 찔려 사망하는 등 그 유형이 잔인했다. 3월에는 부천시에서 P비뇨기과를 운영하던 A원장이(68) 치료결과에 불만을 품은 환자와 승강이를 벌이다 칼에 맞고 쓰러져 사망하기도 했다.

응급실 내 난동은 더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전국 병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경찰에 신고해도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는 불만이 많다. 응급실 폭력은 특히 전공의가 광범위하게 노출돼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나라당 임두성 의원은 의료인을 폭행할 경우 가중해 처벌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일련의 사고는 의사의 치료결과에 대한 환자의 불신감에서 비롯됐다. 서울의 한 개원의는 "예전에는 환자들이 치료결과를 믿고 따라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불신감이 진료현장 전반에 걸쳐 확산됐다"며 씁쓸해했다.

의료 환경의 경쟁구도가 심화되면서 의사들의 직업 만족도 역시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국내 모 제약사가 지난해 하반기 북미와 유럽, 아시아 등 13개국 의사 174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국내 의사의 5%만이 “직업에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반면 부정적인 답변은 79%로 조사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의술을 행하는 만족도 또한 10점 만점에 5.6점으로 일본과 함께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이 같은 이유로는 응답자의 84%가 “전문적 판단을 정부가 요구하는 치료지침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한국 의사의 불만은 취업률이나 자녀 취업 희망조사 등의 결과와 배치되는 경향을 보인다. 전경련이 서울 등 전국 5대 도시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 3명 중 1명은 의사 직업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의사 수입과도 무관치 않다. 노동부가 지난 5월 686개 직업의 연봉을 조사한 결과, 의사의 평균연봉은 7820만원으로 조사됐다. 1위는 1억650만원의 도선사였고, 변호사는 9662만원에 달했다. 기업체 고위임원 역시 9580만원으로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반면 의사는 대표 전문직으로 알려진 변호사보다 2000만원 가까운 연봉 차이를 보인 셈이다. 만족도와 연봉 모두에서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지난 2007년 전국 의과대학생 정신건강실태조사 보고서에서는 의대생의 10.2%가 우울증을 경험한 적이 있으며, 우울증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학생이 전체의 19.6%로 파악됐다. 학업에 대한 부담감이 크게 작용했지만, 예비 의사들조차 고민이 깊다는 결과이기도 하다.

높아진 은행 문턱, 금리는 올라가고…

2000년대 초반 의사 면허증으로 수억원을 대출받던 호시절은 그야말로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이른바 ‘묻지마 대출’의 최대 수혜자였던 의사 직종은 그 위상 하락을 실감해야 했다. 제1 금융권을 중심으로 한 금융권은 의사대상 대출을 줄이고 금리도 대폭 올리는 추세다.

실제로 지난 2월 씨티은행은 닥터론의 한도를 기존 4억원에서 3억5000만원으로 하향조정했으며, 하나은행은 신용대출 한도를 3억원에서 2억원으로 대폭 줄였다. 한 대형은행 관계자는 “대출규모나 금리가 올라갔다고 해서 불만이 많겠지만, 아직도 일반 직종에 비하면 혜택이 폭넓은 편”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의사의 신용을 믿지 못해 일부 제약사는 거래 의사의 신용조회를 관행적으로 행한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용조회가 이뤄져 금융거래에 피해를 입었다는 불만의 목소리다. 제약사는 보통 거래를 시작하거나 결제가 원만하지 않을 경우 신용정보를 조회한다. 해당 의사가 신용불량자면 거래를 사실상 접기도 한다.

의사 집단의 위상 하락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특단의 대책이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여전히 선호되는 직업이긴 하지만, 과거처럼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는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는 것이다. 연간 3000명 이상의 의사가 배출되고 있으며, 전국에 걸쳐 병의원이 포화 상태다. 의약분업으로 촉발한 의사 집단의 신뢰도 하락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대학병원 4년차 한 전공의는 “의사 집단, 특히 젊은 의사들은 매우 절망적인 생각을 많이 갖고 있다. 개원을 보장받기 어려운 점이 크게 작용했다”며 “힘들게 공부했는데, 사회적 위상은 자꾸 떨어지고 있어 전문의 자격 취득 후에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동료가 생겨나고 있다”고 현 상황을 전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부 전문가는 조직적인 대책을 마련하라고 조언한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조병희 교수는 “오랜 연구결과를 보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수가로 의사 집단의 불만이 생겨났고, 특히 젊은 층에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진다”며 “현재 정부가 쏟아낸 규제완화 정책만 하더라도 일선 의사와는 거리가 멀다. 개인사업자인 개원가에는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조 교수는 그러나 현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의료시장의 패러다임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인 만큼 인식 개선이 요구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20년 전만 하더라도 대형병원이 그리 크지 않았고, 개원가의 영역일 일정 부문 보장됐었다. 수가로만 원인을 돌려서는 해답이 없다”며 “서로 단합해 생존을 모색할 때이며, 일선 슈퍼마켓이 마트에 대항해 버스운행을 중단시킨 사례 등이 좋은 예다. 지금 대한의사협회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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