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의료과오와 관련해 법원에서 의료진이나 의료기관 측 책임이 인정되는 사례가 늘어나는 추세다.
경막외 출혈을 입은 환자의 응급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심정맥관 삽입 중 혈관 손상으로 환자가 사망한 사건에 대해 시술 의료진의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된 사례가 있다.
또 파킨슨병 환자에 멕페란을 투여해 파킨슨병이 악화됐다고 판단, 약물을 처방한 의료진의 업무상과실치상죄 성립을 인정한 사례도 있다.
대법원은 ‘의료인 과실을 인정하기 위한 요건 및 판단기준’과 관련, 의료사고에 있어 의료종사자 과실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결과 발생을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예견하지 못했고, 그 결과 발생을 회피할 수 있었으나 회피하지 못한 과실이 검토돼야 한다고 했다.
더불어 과실 유무를 판단할 때는 동일한 업무와 직무에 종사하는 일반적 보통인의 주의 정도를 표준으로 삼아야 하며, 이를 평가할 때 사고 당시 일반적인 의학 수준 및 의료환경과 조건, 의료행위 특수성 등이 고려돼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대법원은 의사 진료행위에는 재량권이 인정된다고 보고 있다.
환자 상황과 당시 의료수준, 의사 지식 경험에 따라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방법을 선택해 진료할 수 있으므로, 합리적인 범위를 벗어난 것이 아닌 한 특정한 진료방법을 선택한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의료과실이 있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환자가 기존 장해로 이미 노동능력 일부를 상실한 상태라면 의료과오로 인한 노동능력 상실 정도는 기왕의 장해와 당해 사건 사고로 인한 장해를 합산, 현재 노동능력 상실 정도를 알아내고 여기에서 기왕의 장해로 인한 노동능력 상실 정도를 감하는 방법으로 산정해야 한다.
일부 의료행위는 의료과오로 인한 불법행위가 없었더라도 필연적으로 일정한 장해 및 노동능력 상실이 예정된 경우가 있다.
이같이 예정된 장해가 있다면, 의료과오로 인한 불법행위가 없었더라도 피해자 노동능력은 그 예정된 장해로 일정 부분 상실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는데, 예정된 장해는 기왕의 장해와 그 성격이 유사하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또한 의료행위로 인한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의료행위 과정에서 업무상과실 존재는 물론 그 과실로 인해 환자에게 상해·사망 등 결과가 발생한 점도 엄격한 증거에 따라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이 이뤄져야 한다.
의사 업무상과실이 증명됐다는 사정만으로 인과관계가 추정되거나 증명 정도가 경감되지 않는다.
아울러 형사재판에서는 인과관계 증명에 관한 판단이 동일 사안의 민사재판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근래 공개된 몇몇 의료과오 소송 하급심 판결문, 상당한 의구심
그렇지만 최근 접한 여러 의료과오 소송의 하급심 판결문을 보면 대법원 판단 법리에 따르지 않아 변호사로서 수긍하기 어려운 판결들이 있다.
한 민사소송에서는 퇴원을 앞둔 환자의 활력징후 감시장치 수치가 정상 범위고 이상 증상에 관한 경보가 없어 진료기록감정 의사가 일관되게 의료과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평가됐다.
그러나 법관은 활력징후 감시장치가 정상적으로 표시돼도 의료진이 환자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등 환자의 임상 상태를 직접 관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법관은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의료진 과실을 인정해 10억원 이상 손해배상책임을 물었다. 과실 유무를 동일한 업무와 직무에 종사하는 일반적 보통인인 의료인이 아닌 법관 기준으로 판단한 셈이다.
또 직전에 여러 차례 자해를 시도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장애가 있는 환자가 입원 중 병원서 자해, 사망한 사건에서 법관은 우울증상으로 인한 노동능력 상실은 무시하고 사고 전(前) 환자 노동능력이 온전하다고 판단해 의료진에 약 1억8000만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사례도 있다.
형사 사건에서도 이 같은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의료진이 심한 흉통으로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에게 심전도검사와 심근효소검사 등을 시행한 후 특별한 이상 소견이 없어 귀가 조치했으나, 이후 환자가 대동맥박리로 인한 다발성 뇌경색으로 사지 마비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환자가 응급실에 내원했을 당시 대동맥박리로 단정할 만한 증상이나 소견이 있었는지, 대동맥박리로 인한 뇌경색 발생이 전적으로 진단 지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기저 질환 등 다른 요인이 개입한 것인지 살펴서 인과관계를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살펴보지 않고 의사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상죄를 인정,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밖에 기저에 심방세동이 있는 환자에게 의사가 항응고제 대신 항혈소판제를 처방했으나 이후 뇌경색으로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이에 민사소송 판단과 무관하게 형사소송에서 과실이나 인과관계를 살펴봐야 하지만 민사소송에서의 과실 인정과 인과관계 추정만 근거로 의사 업무상과실치사죄를 인정하고 금고형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필수의료 환자군, 원하지 않은 결과 발생률 높고 법적 위험성 연결…의료진 부담 가중
최근 응급의료를 비롯해 중환자의료, 분만진료, 소아진료, 심뇌혈관진료, 중증의료 등 국민들 건강 보호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위 ‘필수의료’에 종사하는 의사 부족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필수의료 분야 진료일 경우 해당 환자군의 특성상 원하지 않은 결과가 발생할 빈도가 높고 이것이 법적 위험성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다른 진료영역에 비해 높아진다.
이 때문에 의사들이 위험 회피 측면에서 진료영역을 기피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필수의료 분야 의사들은 대부분 업무와 관련해 형사 고소나 민사소송 등 법적 위험성에 직면할 경우 다른 진료영역 의사나 비(非)중증 환자 관련 의사보다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법적 결과가 긍정적이든, 아니면 부정적이든 무관하게 진료영역을 변경하거나 이전보다 진료가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 의료진은 그나마 대법원 판단을 신뢰해 이를 하나의 기준으로 삼고 업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에 따르지 않아 일관되지 못하고 예측할 수도 없는 하급심 법원 판단을 접하고는 법적 위험성을 회피하기 위해 필수의료를 포기하거나 진료영역 축소 및 소극적 방어진료 등을 하게 된다. 이는 국민 건강의 상당한 저해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대법원 판단 법리에 반하는 의료과오 관련 최근 하급심 판결 경향은 의료계뿐만 아니라 국민 건강에 악영향을 주게 되므로 지양돼야 한다.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한 판결이 가능토록 의료과오 관련 소송 체계가 보완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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