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내일 입원한다. 늘 출근하던 병원에 환자로 입원하려니 며칠 전부터 마음이 뒤숭숭하고 초조함까지 느껴진다.
어제는 버스를 타고 지나며 선유도 고가에서 안양천을 내려다보다가 불현듯 시술대 위 감촉 및 차가운 소독솜과 기구들 달그락거리는 소리, 날카로운 바늘의 감촉이 떠오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술이라면 나도 응급실에서 꽤 많이 해왔는데 그때마다 환자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어 더 따뜻하게 대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환자 앞에서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주삿바늘을 찌르려고 자세를 잡을 때마다 내심 긴장됐던 게 떠오르며 모레 시술하실 교수님도 혹시 떨리시려나 싶어 조금 웃음이 났다.
환자만 긴장하는 게 아니고 의사도 함께 긴장하겠지. 게다가 환자가 의식 멀쩡한 다른 과 펠로우이니 얼마나 신경 쓰이실까.
입원 전날 사실상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일정 무(無)
오늘은 아무 일정도 잡지 않았다. 입원기간 동안 못할 일을 먼저 해두고 싶어서 비워뒀는데, 사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술이 곧 있으니 푹 쉬고 며칠 비울 집을 위해 청소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간단한 시술이지만 직업상 예기치 못한 상황이나 허망한 죽음을 다루다 보니 오늘의 신변 정리는 나에겐 응당해야만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했다. 아이비 화분에 물을 주고 모처럼 사온 소고기를 구웠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자 자전거를 끌고 나가 안양천 합수부에 갔다.
지는 해를 보며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자니 서울에 살면서 제일 많이 방문한 곳이 여기 안양천 합수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괴롭고 쌓인 것이 넘쳐흐르는 날엔 유독 한강을 보러 이곳에 왔다.
자잘하게 잠방거리는 한강을 보면서 수많은 눈물들이 이곳에 모이겠구나 하고 나의 울음도 이곳에 덜어두곤 했다.
한강을 가만히 바라보면 울음을 먹고 자란 가숭어가 수면 위로 튀어오르곤 하는데 그럴 때면 거대한 어항에 먹이를 주고 기른 애완동물을 보는 심정이다.
또 올 게 하고. 오늘은 녀석들을 보지 못해 잔잔한 수면 위에 대고 인사를 했다. 우리 날씨가 풀리면 부디 다시 만나자.
가만히 앉아 한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친구는 언젠가 자신이 죽고 나면 흔적이 남는 게 싫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친구는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하고 소지품은 항상 단출했다.
남겨질 사람의 입장으로 들었을 땐 서운하고 슬펐지만 떠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다시 생각해 보면 친구의 마음도 십분 이해가 됐다. 살아있을 때 잘 살고 떠날 때 남겨진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가볍게 떠나고 싶은 것이다.
남겨진 물건과 기억 중 무엇이 먼저 풍화돼 사라질지는 모르지만 모든 끝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물건 처분과 떠난 이에 대한 기억은 남겨진 이들의 인생에 새겨진 망자의 모습에 달렸다. 맞이하고 싶은 죽음에 대한 견해는 결국 살아가는 태도로 이어진다.
죽음에 대한 내 로망은 정갈하고 단정하게 살다가 깔끔하게 생을 마치는 것이다. 그래서 유난인 줄 알면서도 시술을 앞두고 괜히 마음이 안 좋아져서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는 집을 청소했다.
엉망인 집 모습을 남겨진 사람들이 보면 속상할 테니까. 그리고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가을날의 아름다운 햇살을 눈에 담아뒀다.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물을 한 번 바라보고. 세상에 인사를 해두었다. 이제 됐다. 마지막 순간엔 친절한 사람이 되기를 작게 바라본다. 그걸로 됐다.
발 딛는 순간 모두가 환자 되는 응급실···환자복이 주는 무력감 실감
드디어 입원하는 날이다. 내가 받을 시술은 의대 수업 때 무척 가볍게 여겨지던 시술인지라 어제 신변 정리를 했다는 말을 친구들이 들으면 실없다며 웃을 것이다.
아니, 의사가 아닌 나의 어머니도 시술만 하고 퇴원할 건데 요란을 떤다며 못마땅한 표정을 하실 것이다.
하지만 젊은나이에 심장 시술을 하러 들어가는 나는, 젊은사람들도 얼마나 허망하게 스러지는지 봐온 나는 그 ‘간단한’ 시술이라는 말에도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환자복을 입은 것만으로도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이런 광경을 많이 봤다. 응급실은 발 딛는 순간 모두가 환자가 돼 일상을 박탈당하는 공간이니 말이다.
그런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막상 환자복을 입으니 각오가 무색하게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지만 수액 주사를 달고 있는 것만으로도 등이 굽는 듯했다.
날이 밝아 병실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긴장했던 건 아닌데 평소 낮밤이 바뀌어 근무하는 터라 수면 패턴을 바꾸지 못해 그대로 날을 새 버렸다.
순환기내과 교수님께서 첫 타임으로 시술을 해주신다고 했으니 침대를 옮겨줄 이송 기사님께서 곧 오실 것이다.
시술이 시작되기 전 꽤 많은 사람이 병실을 오갔다. 간호사, 순환기내과 코디네이터, 인턴, 레지던트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병실에 들렀고 마지막엔 이송 기사님께서 오셔서 침대에 누워 시술실로 향했다.
익숙한 얼굴들이 어른거렸다. 직원으로 원내를 누비며 만났던 사람들을 환자와 의료진으로 만나자 느낌이 이상했다. 고맙고 미안하고.
시술실 앞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자 시술실 베드 위로 자리를 옮겼다. 남자 간호사 선생님도 계셨는데 시술 전 준비를 자신이 해도 될지 물었다.
의료진과 환자로 만난 것이니 그분의 업무를 존중한다면 성별로 인한 차이는 두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 괜찮다고 말했다.
정말 민망한 마음이 없었느냐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를 배려해서 물어봐 준 남자 간호사 선생님의 마음이 고마워 괜찮다고 말한 까닭도 있었다.
의사이기 때문에 다시 건강히 지낼 것이라는 것 알고 시술 버텨
시술이 시작되고 순환기내과 펠로우 선생님은 왼쪽 서혜부의 대퇴정맥에 3개의 삽입부를 만들어 카테터를 삽관한 후 계속 밀어 넣어 카테터의 끝을 심장에 위치시켰다. 카테터가 몸 안으로 들어가며 혈관을 들추는 느낌은 꽤나 거북했다.
특히 굴곡진 총장골정맥을 지날 땐 아랫배를 헤집는 감각이 생생했다.
그렇게 피부를 3군데 뚫고 카테터를 3개 위치시킨 뒤 엑스레이를 찍으며 카테터의 끝이 우심방과 우심실에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자극을 주며 빈맥을 유발하는 부전도로를 확인했다.
이제 빈맥을 유발하는 곳을 찾았으니 고주파로 열을 가해 병변을 제거할 차례이다. 절제술을 하는 도구는 오른쪽 서혜부에 새로운 라인을 잡아 삽입했다. 두 다리에 4개의 구멍이 뚫린 채 관을 주렁주렁 달고 있자니 절로 몸이 경직됐다.
교수님은 통증이 있거나 불편하면 미다졸람을 써서 재워주시겠다고 했지만 혹시나 약 기운에 몸을 뒤틀까 봐 맨정신에 양손을 말아 쥐며 시술 시간을 견뎠다.
덕분에 심근 내벽을 뜨겁게 지지는 걸 그대로 느낄 수가 있었는데 인위적으로 심근에 손상이 생기자 턱과 오른쪽 어깨로 뻗치는 방사통이 느껴졌다. 아파서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응급실에 오는 심근경색 환자들이 생각났다.
1분 가량 시간이 지나고 병변이 모두 제거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카테터는 그대로 위치시킨 상태에서 아이소프로테레놀이 투여됐다.
아이소프로테레놀은 인위적으로 빈맥을 유발하기 위해 사용된 약물인데 시술 과정 전체에서 제일 힘들었던 순간이 이 약물이 주입될 때였다.
병변이 남아있다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대는데, 의도적으로 유발된 빈맥은 여태껏 느껴본 빈맥 중에서 제일 심했다. 심장이 빠르고 세게 쿵쾅거리면 박동에 맞춰 몸이 앞뒤로 흔들리는 걸 경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약물은 여러 부작용이 있는데 메스꺼움, 식은땀, 숨참, 시야 흐림, 의식을 잃을 것 같은 느낌 등의 증상이 폭풍처럼 휘몰아쳐 유발 검사를 하는 10분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부전도로가 정상 회로와 가깝게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는데 절제 후 심전도 모니터링에서도 병변이 확인돼 고주파절제를 2번 더 반복했다. 그 말인즉 유발 검사를 2번 더 했다는 뜻이다.
통상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걸린다는 시술을 2시간 꼬박 채워서 하고 병실로 돌아왔다.
큰 정맥에 큰 구멍을 여럿 뚫었기 때문에 6시간 정도 가만히 누워있어야 했는데 지난밤부터 시작해 시술 후까지 18시간 이상 누워있으려니 시술 부위가 문제가 아니라 허리가 아파 괴로웠다.
저녁쯤 레지던트 선생님이 와서 카테터 삽관 부위를 청진하고는 혈관 잡음이 약간 들리지만 절대안정은 그만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통증 때문에 걷는 게 힘들어 화장실 오가는 게 다였지만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통증이 줄어들 것이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그런 유(類)의 고통이니까.
응급실 의사로 일하며 온갖 스트레스와 고된 스케줄에 시달리다가 젊은 나이에 몸이 망가진 것 같아 울적했지만 한편으론 의사이기 때문에 이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론 다시 건강하게 지낼 것이란 걸 아니까 버틸 수 있었다.
불치병과 같은 몇몇을 제외하고 많은 경우들이 당장엔 괴롭고 죽을 것 같아도 숨이 붙어있는 한 잘 먹고 잘 자면서 지내다 보면 언젠가 나아진다.
내 병은 ‘많은 경우’에 해당하는 질병이었고 이런 앎은 고통을 견딜 힘이 된다. 하지만 환자가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늘 유리한 것도 아니다.
알기 때문에 괴로울 때도 많고 무섭고 절망적일 때도 많다. 그래서 어떤 유의 앎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독이 될지를 골라 적절히 포장해서 알려주는 것이 의사의 일이다.
의사가 환자가 되는 일, 환자 이해하는 소중한 경험과 공부
다음 날 퇴원 수속을 하고 병원 문을 나서면서 이렇게 또 환자에 대해 배웠다고 생각했다. 20대 시절 박제된 마음과 달리 내 몸은 지나온 시간 동안 여러 일들을 겪어냈다.
눈에 보이기도, 보이지 않기도 하는 흔적들이 몸에 켜켜이 쌓이면 환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된다.
의사가 환자가 되는 일은 공부를 하는 시간이기도 해서, 언젠가 만난 적 있는 환자를 떠올리며 공감과 반성을 거쳐 앞으로의 진료에 대해 다짐을 하는 것이다.
끙끙 앓는 와중에도 본인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이들을 생각하며 혼자만 느낀 깨달음으로 뿌듯해하는 내 모습이 왠지 짠 내가 나서 피식 웃음이 났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 일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나는 지금 일이 좋다. 의사 인생을 돌아보는 질풍노도 4일이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