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4] 정부 의대 증원 움직임에 대해 의료계가 결사 반대하며 ‘총파업 카드’가 다시 등장했다.
1000명, 2000명, 그리고 4000명까지 구체적인 증원 숫자까지 거론되고 있어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대한의사협회는 전국 의사 회원들을 대상으로 총파업 여부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서울 광화문에서 총궐기대회를 개최하는 등 대정부 투쟁을 본격화했다.
의협, 범대위 발족…전 회원 총파업 찬반투표 실시
그동안 대화와 소통을 강조하던 이필수 의협 집행부가 ‘강성’ 기조로 전환했다. 이필수 회장은 투쟁을 외치며 삭발을 하고 투쟁을 위한 대오를 갖췄다.
이 같은 변화는 12월 3일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서 열린 의대증원 저지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구체화됐다.
비대위는 의대증원 저지 투쟁기구의 공식 명칭을 ‘대한민국 의료붕괴 저지를 위한 범의료계대책특별위원회(이하 범대위)’로 결정하고, 범대위원장은 이필수 현 회장이 맡았다.
이필수 범대위원장은 “비대위에서 범대위로 명칭을 변경한 것은 의대 증원 이슈가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이라며 “제대로 준비 없이 의사 수만 증가한다면 우리나라의 의료는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투쟁조직 명칭이 비대위로 부족하다고 여겨 다소 길더라도 대한민국 의료붕괴 저지 범대위로 결정했다”며 “지난 2020년 때와 비교하면 더 강경한 투쟁 행보에 나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범대위는 12월 6일부터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철야 시위를 시작하는 한편, 같은 날 의협회관 앞에서 투쟁 의지를 드러내는 ‘삭발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또한 12월 11일부터 17일까지 7일간 의협 전 회원을 대상으로 온라인 총파업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에 따라 파업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회원들 중지를 모으면서 동시에 의대 정원 확대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한 집단투쟁에도 나섰다. 12월 17일 서울 광화문에서 전국의사총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진 한파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세종대로에 모인 1000여 명의 의사들은 정부 의대 증원 정책에 대한 강한 유감과 함께 정책 폐기를 촉구했다.
이필수 범대위원장은 단상에 올라 “정부의 비과학적이고 불공정한 일방적 의대정원 확대 추진을 규탄한다”며 ‟필수의료는 몰락하고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고 경고했다.
정지태 대한의학회 회장은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드는데 2배가 넘는 의사가 왜 필요하냐”며 “문제는 인원이 아니라 배치”라고 꼬집었다.
김동석 대한개원의협의회 회장은 “의대 증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은 세금 낭비이자 국가를 망칠 정책”이라며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인 정부 인사에게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명하 서울특별시의사회장은 “인구절벽 시대에 의료절벽의 재앙으로 이어질 의대증원은 반드시 막아내야 한다”고 일갈했다.
홍순원 한국여자의사회 수석부회장은 “기본적 인프라·재정 없는 정원 확대는 교육의 질을 저하시킬 것”이라며 “의대 증원으로 인한 과잉진료 양산과 의료비 지출 증가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범대위 시작부터 삐걱…최대집·임시총회 ‘찬물’
의협은 야심차게 범대위를 꾸리며 투쟁 전선을 펼쳤지만, 시작부터 스텝이 꼬였다.
이필수 회장은 9.4 의정합의를 이끌어 낸 장본인인 최대집 전(前) 의협회장을 투쟁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묘수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최 전(前) 회장 합류에 대한 시선이 대체적으로 곱지 않았다.
특히 지난 2020년 최대집 전 회장과 함께 의사 파업 투쟁에 앞장섰던 의대생과 전공의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최 전 회장을 투쟁위원장에 임명한 의협에 “유감”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
이들은 2020년 문재인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 등을 추진할 때 전면에 나서 집단 휴진 등에 돌입하며 정부 정책을 저지하는데 중추 역할을 했다.
당시 전공의 집단휴진 참여율은 80%였으며, 의대생들도 의사 국가고시를 거부했다. 그런데 최 전 회장이 전공의들과 소통하지 않고 정부와 돌연 협상하면서 대전협과 큰 갈등이 빚어졌다.
나아가 최 전 회장은 9.4 의정합의가 독단적이었다고 비판한 제23기 대전협 집행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까지 제기했다. 원고 패소로 결론나면서, 전공의와 최 전 회장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의협이 의사 파업 투쟁을 이끌 선봉장으로 최대집 전 회장을 투쟁위원장으로 선임했으니, 전공의와 의대생 등 젊은 의사들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
최대집 투쟁위원장은 이를 염두에 둔 듯 범대위 발족식에서 “투쟁 승리의 관건은 일치단결”이라며 “과거의 견해차나 갈등은 모두 일단 덮고 전 회원이 일치단결해 투쟁 승리 후 예전의 시시비비 중 가릴 게 있다면 다시 가리자”고 발언했다.
그러나 내부 반발이 잦아들지 않자 결국 최대집 투쟁위원장은 사의를 표명했다.
범대위 구성 과정에서의 잡음은 이필수 집행부 중심의 범대위가 아닌 의협 대의원회 산하 비대위를 꾸리자는 요구로 이어졌다.
전국의사궐기대회가 예정된 12월 17일 오전에 열린 임시대의원총회에서 해당 안건에 대한 표결이 이뤄졌다.
임총 소집을 발의한 주신구 대의원(대한병원의사협회의장)은 “범대위 위원장은 회장이 맡을 수 있지만 투쟁위원장 선임까지 독단적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필수 집행부는 독단적 회무로 회원들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 엄동설한에 회원들은 왜 거리로 내몰려야 하냐.
대의원 산하에 비대위를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해당 안건은 부결됐다. 대의원들은 범대위 체제로 의대 정원 확대 저지에 나서는 게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며 이필수 집행부에 힘을 실어줬다.
한편, 정부는 의협이 총파업 여부를 묻는 대회원 투표를 실사하는데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의협이 총파업 여부를 묻는 대회원 투표를 예정한 가운데, 정부가 의정협의 결렬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냐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12월 6일 달개비에서 열린 의료현안협의체 제20차 회의 시작 전, 의협의 총파업 여부를 묻는 대회원 투표를 두고 신경전을 펼쳤다.
복지부 정경실 보건의료정책관은 모두 발언을 통해 “지금 필요한 것은 언제든 뜻이 다르면 협의를 단절하겠다는 준비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합의안을 찾겠다는 의지와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협상 의지를 피력했다.
그러면서 “의대정원 증원에 대해 의료현안협의체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도중 의협이 전체 회원을 대상으로 총파업 투표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협의 결렬을 전제하고 협의체 회의에 임하고 있는 것는 아닌지 당사자로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불쾌감을 나타냈다.
정 보건의료정책관은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진정성과 인내심을 가지고 협의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지난 회의에서 수술, 처치 , 입원 등 저평가 항목의 보상 강화와 지역 간 의료 불균형 해소를 위한 지역 수가 확대 필요성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양동호 의협 단장은 “의협은 공권력에 맞선 비대위 구성과 총파업은 불가피한 행위이며, 여론에 따른 의대정원 확대 정책은 불합리하다”고 맞불을 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