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생사(生死)의 문턱을 넘나드는 환자를 치료한다. 때에 따라서는 생사를 결정지은 치료에 책임을 지기도 한다. 그래서 의사들은 법정에 서는 일이 종종 있다. 법정에 선 의사가 시행한 진료에 대해 술기적, 윤리적 책임을 질 때도 있지만 요양급여비용 착오 청구나 행정청의 부당한 처분 등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작년 연말부터 올해도 어김없이 많은 의사들이 법정에 섰다. 몇몇 판결에서 재판부는 “억울하게 법정에 섰다”라고 주장한 의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의료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복지부의 부당한 가중처분을 비롯해 심평원의 부당 삭감, 자궁 내 태아 사망사건 등으로 재판정에 선 의사들이 그 주인공이다. 데일리메디는 최근 법정에서 억울함을 푼 판례와 의료계 내 반응을 살펴봤다.[편집자주]
法 “의료기관 부당청구 가중처벌 복지부 부당”
의료기관에 ‘부당청구’를 근거로 가중처벌을 내리는 복지부 처분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행정처분 착오는 일선 의료기관 입장에서는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울고등법원은 작년 11월 “보건복지부의 가중처분이 부당 했다”며 B산부인과에 대한 과징금 2943만원 부과 처분 취소 판결을 내렸다.
복지부는 A원장이 운영하는 B산부인과의 요실금수술 청구 내역에 관해 현지조사를 실시한 결과, 인정기준 조작 사실을 확인하고 과징금 처분을 내렸다. 또한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이를 토대로 요양급여비용 환수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A원장은 요실금수술 심사지침의 의학적 근거가 부족 하고, 현지조사가 위법인 만큼 복지부의 재량권 일탈·남용에 해당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고등법원은 “복지부 과징금 처분과 건보공단 급여비용 환수처분이 모두 적법하다”는 1심을 파기하고 복지부의 과징금 처분을 취소한다고 판시했다.
복지부가 국민건강보험법을 근거로 과징금 가중처분을 내린 것은 지나치다는 게 고등법원의 판단이다.
국민건강보험법에는 업무정지 또는 과징금 처분을 받은 자가 위반사실이 확인된 시점으로부터 5년 이내에 처분 받은 사실이 있는 경우 업무정지 또는 과징금의 2배에 해당하는 처분을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A병원은 지난 2010년 5월 복지부로부터 내원일수 허위청구 등을 이유로 60일 업무정지 처분에 갈음한 9400여 만원의 과징금 부과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복지부는 과징금 처분 이전인 2009년 1월 6일부터 2009년 7월 18일까지 조사 기간 동안 요류역학검사 결과를 조작해 요양급여비용을 청구·지급받았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법원은 “5년 이내에 위반행위를 한 바 없음에도 위반사실 확인만으로 가중처분을 적용하는 것은 처분청의 자의적이고 불합리한 법 적용”이라고 판시했다.
업무정지 또는 과징금 처분을 받은 이후 위반행위를 한 경우가 아니어도 가중처분을 적용할 수 있다고 해석하면 국민건강보험 법상 과징금 부과 및 가중처분의 성격이나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법원의 이러한 판결에 대해 개원가는 “행청처분에 착오가 생기면 해당 의료기관은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다”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대한개원의협의회 김재연 보험이사는 “복지부 행정처분에 착오가 생기면 개원가는 치명적인 타격이 불가피하다”며 “착오가 생길 경우 즉시 시정조치를 내려 개원가의 피해를 최소화 해야 한다”고 밝혔다.
경기도 산부인과지회 이동욱 회장은 “당국은 행정처분이 처벌 보다 계도에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계도 후에도 위법행위가 반복됐을 때 고의성에 근거해서 처분을 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복지부 관계자는 “이번 판결의 경우 가중처분이 이뤄진 2차 적발의 시점에 문제가 있었다”며 “1차 처분 후 동일한 위반 행위가 적발되더라도 그 행위가 처분 이전에 발생한 경우 가중 처분은 불가하다는 취지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같은 사례는 굉장히 드물다”며 “이번 판례의 취지를 반영해서 앞으로는 비슷한 위반행위 발생과 행정처분 시점을 잘 살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단장비 신고 이틀 늦었다고 넉달치 가산금 안준 심평원 ‘패(敗)’
의료장비 신고 후 이틀 늦게 나온 증명서를 문제삼아 인력보 상금을 주지 않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이 제1심 및 제2심에서 잇따라 패소한 후 상고를 포기했다. 따라서 심평원의 항소를 기각시킨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유지된다.
사건은 A병원장이 2016년 9월 6일 촬영장비 고장으로 새로운 장비를 교체·설치하면서 비롯됐다. A요양병원 원장 B씨는 새로운 장비를 교체, 설치하던 날 관할 보건소에 ‘진단용 방사선 발생장치 양도 신고’와 ‘진단용 방사선 발생장치 설치 및 사용 신고’를 했다.
보건소 직원은 신고 당일 양도신고증명서를 발급했지만 ‘설치 및 사용 신고서’에 첨부한 제조허가증의 인쇄상태가 좋지 않다며 다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B씨가 제조업체에 사본을 요청해 다시 보건소에 제출하고 서류 확인 및 심평원의 바코드 발급 과정을 거쳐 설치·사용 증명서는 신고 후 이틀이 지나서야 나왔다.
심평원은 신고서를 9월 6일에 접수하고 확인서는 9월 8일 발급돼 하루동안 방사선 장비를 적법하게 설치·운영했다고 볼 수 없다며 4개월간 방사선사에 대한 필요인력 가산금을 불인정한다는 처분을 내렸다.
제1심에서 재판부는 “방사선 발생장치의 설치·운영에 있어 신고인이 적법한 신고를 마치면 바로 신고의 효력이 발생한다” 라고 판시했다. 행정청인 심평원은 신고 수리 여부에 재량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판결에 심평원은 항소 했으나 2심 재판부 역시 같은 이유로 심평원의 항소를 기각 시켰다.
항소심 후 해당 요양병원 원장은 “불합리한 삭감이나 불인정 관행이 반복돼선 안된다는 생각에 소송을 제기했다”라며 “불합리한 관행을 바로잡지 않으면 정당한 진료를 할 수 없게 되고 그 피해는 결국 환자들이 입게될 것”이라고 밝혔다.
원고의 변호를 맡은 서울의대 출신 이영호 변호사는 “고법 판결에서는 기존의 의료방사선 안전관리편람 및 보건복지부 행정해석과 달리 요건을 갖춰 신고한 경우 신고증명서의 발급 여부와 무관하게 신고 당시부터 사용할 수 있는 기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라며 “향후 방사선기기의 설치·사용 신고를 한 의료기관에서 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시점에 관해 논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자궁내 태아사망 1심 실형 받은 의사, 항소심 ‘무죄’
자궁내 태아사망으로 8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던 산부인과 개원의가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인천지방법원은 금년 1월10일 자궁내 태아사망사건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피고인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에 유죄를 선고한 1심에서는 사실오인 및 법리 오해에 의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의료계를 뒤흔들었던 자궁내 태아사망 사건은 지난 2014년 발생했다. 독일인 산모 A씨는 2014년 11월 24일 오후 10시경 분만을 위해 B씨가 운영하는 의원에 입원했다. 11월 25일 오전 6시 경 B씨는 태아의 심박동수가 급격히 낮아지는 증상을 발견하고 이에 대처했다.
같은 날 오후 A씨가 진통을 시작하자 B씨는 무통주사액을 투여 했고 이 과정에서 4시 30분 경 태아의 심박동수에는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오후 6시경 무통주사의 약효가 떨어져 다시 통증을 호소하는 A씨를 살피는 과정에서 B씨는 태아가 사망한 사실을 발견했다.
1심에서 재판부는 지속적으로 태아 심박동수를 확인하는 의료적 조치가 부족했다는 이유를 들어 B씨에 금고 8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인천지방법원은 항소심에서 “태아 사망의 구체적 원인, 사망 시각을 알 수 없었다는 점에서 태아 심박동수를 측정 했더라도 태아 사망을 막을 수 없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들어 피고인 무죄를 선고했다.
태아 심박동수 측정을 빈번하게 측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료인의 과실이 있지만 태아 심박동수 감소가 발견됐더라도 사망을 막을 수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데 무게를 둔 것이다.
재판부는 “태아 심박동수가 감소하는 것이 발견됐으면 B씨는 제왕절개수술 시행을 결정했을 것”이라며 “태아 심박동수 감소를 발견한 후 제왕절개수술을 결정했더라도 피고가 운영하는 소규모의 병원에서는 수술을 준비하는 데 1시간 가량 걸리는데 태아의 심박동수 감소를 발견하고 수술을 시행했어도 사망을 막을 수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의료계에서는 항소심의 판결을 환영했다. (직선제)대한산부 인과의사회(이하 (직선제)산의회) 김동석 회장은 “사필귀정” 이라고 표현했다.
김 회장은 “제1심은 부당했고 사회적 파장도 너무 컸다”며 “모니터를 한다고 해서 태아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예후가 좋아진다는 말은 미국에도 없는데 환자와 의사 간 불신만 높아지는 판결이었다. 의사 입장에서는 환자 보는 게 무섭다”고 말했다.
서울시의사회 김숙희 前 회장은 “당연한 결과”라며 “서울역 앞에서 (직선제)산의회 주도로 이뤄진 회원들의 집회가 영향을 미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의권이 침해당할 때는 사회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