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하] 대한민국 의료는 최근 20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루며 선진국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특히 암(癌) 치료는 정밀의학 발전과 초고가 의료장비 도입 등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술기와 생존율 측면에서 절대적 입지와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약적 발전 뒤에는 왜곡된 의료전달체계와 저수가 영향 등으로 대형병원 환자쏠림, 수도권과 지방 의술 격차 등 극복하기 어려운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은 이러한 기형적 현상에 더욱 불을 붙였다. 이에 데일리메디는 대한민국 암 치료 현주소를 진단하고 향후 나아갈 방향 등을 논의하기 위해 국내 암 치료를 대표하는 빅5 암병원장들과 심도 깊은 논의를 가졌다. 이번 좌담회에는 ▲김태원 서울아산병원 암병원장 ▲금기창 연세의료원 암병원장 ▲양한광 서울대병원 암병원장 ▲이우용 삼성서울병원 암병원장 ▲허수영 서울성모병원 암병원장(이름 가나다 順)이 참석했다. 이들은 향후 대한민국 암 치료 발전 방향과 빅5 병원 역할, 암 치료 진료환경 패러다임 변화 등에 대해 진솔한 의견을 개진했다. [편집자주]
①서울대 등 빅5 암병원도 달갑잖은 '환자 쏠림'
②빅5 암병원 '이구동성'…"진료량 아닌 연구력"
사회 : 암 연구 활성화를 위한 제언을 한다면
김태원 암병원장 : 우리나라는 임상 진료뿐만 아니라 연구 분야에서 최근 기여도가 높아지는 등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외국하고 질적 차이가 많은 게 현실이다. 암연구 활성화를 위해서는 ‘임상, 영상, 유전자 자료 등의 통합’이 매우 중요하다. 수 많은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는 병원들이 이를 어떻게 진료와 연구에 활용할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양한광 암병원장 : 암 치료의 큰 축은 항암제다. 우리나라는 항암제 개발을 위한 임상시험의 글로벌 주축으로 탄탄한 위상을 다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세계 유수의 제약사들이 신약 검증을 위해 임상시험을 의뢰하는 건수가 늘고 있고, 국내 의료진이 글로벌 임상시험의 책임연구를 맡는 경우도 적잖다. 최근에는 의료진이 직접 항암제를 개발하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수술이다. 새로운 항암제는 제약사들이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해야 하는 만큼 천문학적인 액수가 들어도 투자한다. 반면 수술은 효과를 증명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이 빈약하다. 분야에 따라 단일 병원이 아닌 여러 병원들이 협업해서 같이 검증하고 제시할 수 있는 등의 방안을 고려해 봐야 한다.
이우용 암병원장 : 해외 유수의 암병원들을 벤치마킹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논문을 위한 연구가 많다는 사실이다. 정말 좋은 연구는 진료와 함께 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이런 부분에 취약하다. 자체 IRB(임상시험윤리위원회)를 믿어주고 교류를 활성화해야 하는데 아직도 제도가 많이 못따라 가고 있어 안타깝다.
“4차 암병원 역할, 임상 연구 활성화”
사회 : 내·외부적으로 빅 5병원에 대해 ‘4차 암병원’으로의 정체성 재확립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를 위해 어떤 지원이 필요한가.
양한광 암병원장 : 서울대암병원은 각 센터별 평가를 진행하는데 가장 큰 비중을 '연구'에 두고 있다. 진료량이나 수익률은 상대적으로 적게 반영한다. 물론 경영적 측면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진정 '4차 암병원' 역할을 위해서는 연구가 주력이 돼야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많은 환자를 보지 않아도 운영이 가능한 구조를 보장해야 한다.
김태원 암병원장 : 대형 암병원들이 정체성을 재정립 해야 하는 시기다. 진료 분야에서는 난치암·재발암에 더 집중해야 한다. 연구 분야에서는 국내 기업과 파트너십을 구축해 스스로 항암제를 개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적정성 평가 등 시스템이 아쉬운 점이 많다. 수도권 대형병원과 지역거점병원 지표를 달리해야 국내 암 치료 불균형이 해소된다. 정교한 정책적 설계가 필요하다.
이우용 암병원장 : 고급 인력이 많은 곳에서 단순한 진료량을 지향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다. 1년에 수술을 수 백건씩 하는 것 보다 연구를 통해 신기술 또는 신약을 개발하면 전세계 수 백만명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치료에만 몰두하도록 하는 것은 인류에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 없다. ‘4차 암병원’에 대한 역할을 제대로 주고 현재 훌륭한 인력을 활용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양한광 암병원장 : 외래환자·수술환자·입원환자 임상연구 참여율 등으로 해당 암센터 수준을 평가하는 환경이 절실하다. 과거에는 임상시험 참여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많은 인식 변화가 일고 있다. 환자에게는 또 다른 치료기회를 얻을 수 있고, 의사에게는 새로운 치료제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만큼 임상시험 활성화가 필요하다.
금기창 암병원장 : 최고 암병원이 되기 위해서는 임상시험에 많은 환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빅5 암병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며, 이에 대한 국가 지원이 필요하다. 얼마나 많은 신약 활용 기회와 임상시험 프로토콜이 있는지, 재발암·난치암 치료율 등을 통해 진정한 의료 질평가가 가능하다.
"암 전문가 양성, 국가적 사안으로 접근 필요"
사회 : 빅5 암병원은 교육 부분에서도 절대적 입지다. 암 전문가 양성체계에 대한 견해는
허수영 암병원장 : 가톨릭의료원은 산하에 여러 병원이 운영 중이다. 서울성모병원에 자리가 없으면 다른 병원으로 보내 치료기회를 부여하고자 노력 중이다. 하지만 병원마다 정원이 정해져 있고, 이들을 선발해 교육하는 부분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주먹구구식 교육이 아닌 체계적인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체계를 바꾸고 있다.
이우용 암병원장 : 적어도 '전문가'에게 실적을 강요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병원 입장에서 보면 이들이 연구를 통해 인프라를 키워나갈 수 있도록 지원해 줘야 하지만 이는 곧 비용과 직결된다. 짅정 암 분야 전문가를 양성하고 싶다면 그들이 진료와 연구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시설과 재정적 지원, 인프라 구축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
금기창 암병원장 : 의료인력은 국가 미래인 만큼 정부 차원에서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외과 의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공의 주 80시간 근무 제한을 만들어 놓고 병원에게 ‘알아서 육성하라’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태다. 20년 후 누구에게 수술을 받아야 할지 벌써 걱정이다. 국가적 지원이 없다면 의료인력 양성도 장담하기 어렵다.
양한광 암병원장 : 수도권 대형병원과 지역병원 역할 분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암수술 외과의사 부족 문제다. 암수술을 수행할 외과의사 수급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보건복지부가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외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 지방에서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은 암수술을 담당할 종양외과 세부전문의(General Surgical Oncologist, GSO)를 육성해야 한다.
김태원 암병원장 : 한국에 맞는 새로운 진료지침을 마련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 병원들도 연구능력 배양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내 암 분야는 차세대 의료인에게 술기 전수 등 지나치게 임상 위주의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진료를 바탕으로 연구에도 관심을 갖고 능력을 배양시켜 줄 시스템이 필요하다.
"암치료 패러다임 변화, 능동적 대처 필요"
사회 : CAR-T 치료제, 정밀의학 등 새로운 치료법이 급부상하고 있다.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김태원 암병원장 : 세포치료제, 면역항암제 등이 쏟아져 나오면서 환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고무적이지만 아쉬운 점은 이런 부분을 주도하고 있는 게 다국적 제약회사이고 비용도 상당히 고가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비싼 치료법을 국내 건강보험 재정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향후 국내 병원들은 신약 개발 기업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
이우용 암병원장 : 기존에는 병기와 영상의학에 기반한 치료에서 유전체 기반 다학제 치료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빨리 적응해야 하는데 외과의사 입장에서 보면 사실 섭섭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환자에게 보다 나은 치료법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 의료가 차세대 치료의 중추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빅5 암병원, 동반자적 관계로 시너지 발현"
사회 : 끝으로 국내 암 치료 발전을 위한 제언은.
양한광 암병원장 : 오늘 좌담회를 통해 빅5 암병원뿐만 아니라 지방 암병원들과 토론의 장 및 협의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임상, 연구 등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들은 근본적으로 수가를 개선하지 않으면 해결이 어렵다. ‘수가 현실화’라는 큰 수술을 할 때가 됐다. 그렇게 된다면 전문인력들의 교육 수준도 동반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이우용 암병원장 : 지향점은 분명하다. 빅5 암병원은 진료량을 줄이고 연구량을 늘려야 한다. 치료법이 대동소이한 초기 암은 각 지역에서 담당하고 난치암 등 고난도 치료가 필요한 암환자들 위주로 진료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들은 의사를 믿고 치료에 적극 참여해 줘야 한다. 정부는 이러한 구조가 꽃 피울 수 있도록 지원을 늘리고 규제는 과감히 풀어야 한다.
허수영 암병원장 : 국내 암 치료는 선진국 못지않은 수준으로 성장했다. 많은 선생님들의 노력 덕분이며 국가도 일정 부분 도움을 줬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진료체계가 무너지고 만성적인 인력난에 허덕이며, 경영 압박을 받는 등의 문제는 병원 자체 노력으로는 역부족이다. 국가가 나서야 의사들이 본인의 분야에서 자부심을 갖고 진료나 연구에 임할 수 있다.
김태원 암병원장 : 좌담회를 통해 많은 병원들 책임과 특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쏠림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의료전달체계 및 평가체계 정교화, 수가체계 보완 없이 빅5 암병원이 중증질환 중심으로 전환한다면 환자 쏠림이 더 심화될 수 있다. 전문가 단체인 학회 등과 정교한 논의를 이어가길 하는 바람이다.
금기창 암병원장 : 빅5 병원이 경쟁적 관계가 더 빠른 발전의 기폭제가 됐음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동반자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빅데이터 기술 등 선진국 보다 앞서갈 수 있는 영역이 무궁무진하다. 그 가능성과 경쟁력 역시 상당하다. 각 병원들이 의기투합하면 앞서갈 수 있다. 앞으로 자주 모이고 정부와 국회와도 소통의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