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시간, 100km 떨어진 응급실로 이동하던 임신부가 구급차에서 출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99% 응급실이 24시간 운영 중"이라며 "응급실 붕괴가 아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비단 응급실에서만 터져 나오는 비명이 아님에도 이를 외면하는 정부에 의료계는 물론 국민들 속만 타들어 가고 있다.
정부 "응급의료 공백, 의료개혁 전부터 누적된 문제"
지난 2일 "응급실 붕괴 상황이 아니"라는 정부 입장은 세차례 표출됐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날 오전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최근 응급실 상황을 두고 "어려움은 있지만 진료 유지는 가능하다"며 "현재 문제는 의료계 집단행동 이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의료개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가 부족한 것"이라며 "정부는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사를 파견하고, 일반의 채용 시 인건비 지원 등 조처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오후 열린 응급의료 일일브리핑에서 박민수 복지부 2차관 역시 "전반적인 응급의료 역량을 종합적으로 볼 때 일부 어려움은 있지만 일각에서 제기하는 것처럼 부오기를 우려할 상황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특히 "409개 응급실 중 99%인 406개소는 24시간 운영하고 있고 6.6%인 27곳은 병상을 축소 운영 중"이라며 "전공의 이탈로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는 평시 대비 73.4% 수준이지만 군의관, 공보의 진료지원(PA)간호사, 촉탁의 채용 등으로 인력을 보강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 대통령실이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대통령실은 이날 "응급의료공백 문제는 의사 부족으로 수년간 누적된 문제"라며 "정치적 유불리 셈법을 따져서 수년간 방치해 온 의료 개혁을 윤석열 정부는 오로지 국민 생명권과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추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은 전날 여야 대표 회담에서 나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응급실 발언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 대표는 당시 "응급실 뺑뺑이로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는 사고가 이미 지난해 총발생량을 초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통령실은 "이 대표 주장은 정부 통계로 확인되지 않은 것"이라며 "명확한 근거 없이 '응급실 뺑뺑이'로 사망 사고 늘었다는 주장은 의료진 사기를 저하시키고, 불필요한 국민 불안을 자극할 뿐"이라고 일축했다.
醫 "10년 걸쳐 가꾼 대한민국 응급체계, 6개월 만에 역행 중"
정부의 이 같은 입장에도 응급실 붕괴에 대한 경고는 단지 경고가 아닌 현실화되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전국의과대학 교수 비상대책위원회(이하 전의비)는 2일 성명서를 내고 "정부 발표와 다르게 이미 많은 응급실은 정상적인 진료를 못 하고 있다"며 "추석을 기점으로 응급진료가 안 되는 질환이 더욱 증가하고 응급실을 닫는 대학이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의비에 따르면 지난 1일 기준 전국 57개 대학병원 응급실 중 분만이 안 되는 곳이 14개, 흉부대동맥수술이 16개에 이르렀다. 더불어 영유아 장폐색시술은 24곳, 영유아내시경은 46곳에서 불가했다.
전의비는 "건국대충주병원, 순천향대천안병원, 국립중앙의료원, 세종충남대병원, 이대목동병원, 강원대병원, 여의도성모병원이 응급실을 일부 닫았거나 닫으려는 계획이 있다"고 전했다.
이성우 대한응급의학회 정책이사는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 의료대란특위가 개최한 간담회에서 "응급의학과 진료는 전공의가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는데 이 인력이 빠지며 이미 임계점에 도달한 상황"이라며 "내년에 들어올 전공의도 줄어 최소 4년 이상의 혼란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정경원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도 "정부 말대로 '응급실 뺑뺑이'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적어도 중증외상환자 치료에서는 외상센터가 세워진 뒤 응급실 뺑뺑이가 기존의 3분의 1로 감소했다"며 "그런데 최근 의료개혁 움직임으로 흐름이 오히려 역행해 외상센터 설치 전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국민 67.4% "대통령 사태 파악 잘못"
국민들의 불안 역시 고조되고 있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이하 전의교협)이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31일부터 이틀간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응답자 중 64.5%가 '응급실 진료 제한 등 의료공백이 지금보다 더 악화할 것'이라고 답했다. '지금과 변화가 없을 것'이란 응답은 12.5%, '지금보다 좋아질 것'이라는 응답은 17.9%에 그쳤다.
더불어 응답자 중 67.4%는 '대통령이 현재의 의료공백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밝혔다.
전의교협은 "이제 국민들마저 정부 정책이 잘못됐다고 보고 있으며, 정부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6개월 만에 대한민국 의료를 철저히 붕괴시키는 정부의 어리석음을 인내해 줄 국민은 더 이상 없다. 정부는 사태 해결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