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의료기관을 방문하는 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다.”
서울의과대학에서 지난해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간 실시한 ‘의대생이 예비의사로서 갖춰야할 핵심인성 역량 및 교육방법’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꼽혔다.
특히 이번 설문조사는 의과대학 학생 589명 외에도 교수 154명, 학부모 228명, 교직원 및 병원 직원 161명 등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는 뛰어난 지식과 기술로 환자를 ‘잘’ 치료하는 것만큼 환자에게 신뢰를 줄 수 윤리의식을 갖춘 의사가 주목받는다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몇몇 의료기관의 잘못된 행태로 신뢰성이 훼손되고 있다. 지난 해 다나의원 사태는 대한민국 의료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앞선 메르스 사태로 인한 충격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비슷한 유형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의료기관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도는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다나의원은 일회용으로 사용해야 할 주사기를 재사용, 내원환자 97명이 C형 간염에 걸리는 집단감염 사태를 일으켰다. 이들은 환자의 혈액이 묻은 주사기로 다른 환자 배에 피하주사를 놓기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파장을 일으켰다.
다나의원 사태를 계기로 지난 5월 19일 국회는 일회용 주사 의료용품을 재사용할 수 없게 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위반 시 의사 면허를 취소하는 ‘의료인 면허제도 개선방안’까지 논의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일회용 의료기기 재사용 근절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4월에는 일회용 주사기 재사용 의심 의료기관 관련 40여 건의 신고가 접수돼 해당 의료기관에 대한 현장점검이 실시됐다.
전국적으로 거짓과 양심을 맞바꾼 의료기관의 행위로 인한 제2, 제3의 다나의원 사태가 이어지고 유사한 유형의 판례도 늘어나고 있다.
“주사기 재사용 간호조무사 방치 병원장 ‘9억’ 배상 책임”
간호조무사가 주사기를 재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했다는 이유로 I산부인과 병원장인 이 씨가 9억 원의 배상 책임을 물게 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5민사부(부장판사 김종원)는 이 씨가 의사로서 양심적인 의료행위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총 8억7717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산부인과 전문의 이 씨는 지난 2009년부터 간호조무사 조 씨와 함께 I 산부인과를 운영해왔다.
하지만 간호조무사 조 씨로부터 주사제를 투여 받았던 243명의 환자들 중 61명이 비정상형 마이코박테리아 감염과 화농성 및 염증성 관절염, 결핵군 감염 등 집단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다나의원 사태를 연상케하는 집단 감염으로 합동수사단이 꾸려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원 환자들에게 직접 주사제를 투여했던 간호조무사 조 씨는 자살했다.
원장 이 씨는 조무사의 무면허 의료행위를 방치해 집단 감염을 일으킨 혐의(업무상과실치상)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과실을 입증 받지 않아 ‘의료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예상과 다른 판결이 나오자 환자 18명은 “이 씨는 의사이자 간호조무사 조 씨를 고용한 사용자로서 공동 불법행위를 저지른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하며 이들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이 씨는 “간호조무사 조 씨가 저지른 불법 행위를 옆에서 지휘, 감독한 적이 없고 I의원의 실질적 운영자에게 고용돼 명의만 대여했기 때문에 배상 책임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씨가 명의만을 대여했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의사로서 I의원 내부 의료행위와 관련해 간호조무사를 책임지고 지휘, 감독해야 할 위치에 있다”며 이 씨에게도 집단 감염을 일으킨 혐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업무상과실치상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해도 간호조무사의 의료 과실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자살한 조 씨에 대해서는 “미 개봉 주사기와 주사제 샘플 검사에서 다른 균이 검출되지 않았기에 조 씨가환자들에게 주사제를 투여하는 과정에서 병원균이 침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며 여러 부위에 재사용한 흔적도 발견돼 외부 병원균이 주사기와 함께 환자의 피부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높다고 결론졌다.
“재사용 일회용 투석필터로 부당청구 병원 업무정지 적법”
일회용 투석필터를 재사용해 총 1억7118만원의 요양 급여와 의료 급여비를 부당 청구한 병원이 업무정지 적법 판결을 받았다.
서울행정법원 제12부(부장판사 장순욱)는 서울 마포구 소재 A내과의원 원장 정 씨가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낸 업무정지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정 씨는 "일회용 투석필터라도 안전하게 재처리하면 환자 건강에 지장이 없다"고 주장하며 복지부 업무정지 처분에 억울함을 호소해왔다.
그동안 A내과의원은 만성신부전환자를 대상으로 혈액 투석을 전문적으로 해왔고 조사 과정에서 일회용 투석필터 ‘Dislyser' 7940개를 재사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재사용한 일회용 투석필터로 1억7118만원에 해당하는 부당 급여비까지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정 씨는 “일회용 투석필터이지만 재사용 투석필터와 비교해 기능성, 안전성 측면에서 다를 바가 없다”며 “안전하게 재처리해 사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료기기법에 재사용을 금지하는 규정이 따로 없고 요양급여와 의료급여비 산정 기준도 투석필터를 일회용으로 제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적법한 행위”라고 말했다.
이어 “혈액투석기 재처리기가 도입된 1999년부터 국립의료원을 포함한 다수 기관에서 일회용 의료기기를 재사용해온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단속한 사실이 없다”며 “이는 (일회용 의료기기를) 재사용해도 무방하다는 공적인 견해를 묵시적으로 표명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원은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법원은 “일회용 의료기기 첨부문서에 ‘일회용’과 ‘재사용 금지’라는 문구를 명기하도록 하는 것은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취지”라며 “처벌 및 제재 명문 규정이 없더라도 일회용 의료기기의 재사용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판부는 “재사용이 안전하다고 주장하지만 공적 기관에 의해 검증된 바가 없다”며 “복지부가 17년 동안 재사용에 대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일회용 투석필터 재사용을 허용한다는 견해를 공식적으로 밝혔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