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울산 미포만에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 설립 계획을 발표하자 모두 “미쳤다”고 했다. 전무한 기술력과 열악한 자본력의 한국 상황을 감안하면 허무맹랑한 얘기가 당연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모래사장 사진 한 장,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유럽으로 향했다. 각국의 냉대를 거듭한 끝에 영국 버클레이은행을 찾았다. 물론 영국은행의 답은 “NO”였다. 정주영 회장은 그때 바짓주머니에서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소. 다만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져 국민의 능력과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요.” 결국 정주영 회장은 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물론 영국은행은 지폐 속 거북선이 아닌 정주영 회장의 배짱과 자신감을 믿었겠지만 한국을 세계 최고의 조선강국으로 만든 시발점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편집자주]
가능성 묵히는 한국 의료
정부는 미래 국가 신성장 동력 산업으로 ‘의료’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본격적인 산업화 추진에 나서기로 했다.
전세계 의료산업 시장은 약 8000조원 규모로, IT산업을 이어 국가의 경제성장을 이끌 차세대 산업으로 제격이라는 판단이었다.
세계적 수준의 한국 의료진의 술기와 의료기관 운영 시스템, 건강보험제도 등 경쟁력과 잠재력이 충분한 만큼 전망도 밝았다.
우수한 의료인력과 가격 대비 높은 의료 서비스 질을 바탕으로 막대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국가 미래 성장 동력으로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은 순리였다.
실제 2013년 한해 동안 총 21만명의 해외환자가 우리나라에서 진료를 받았으며, 2009년부터 5년 간 63만명의 해외환자가 1조원의 진료비를 지불했다.
해외진출 역시 아랍에미리트 왕립병원 위탁운영을 비롯해 중동, 중국, 남미 등에서 굵직한 성과들이 이어지며 고무적인 상황을 맞았다.
이 처럼 시장은 무궁무진하고 가시적인 결과물도 나왔지만 대내적으로 국제의료사업 육성을 위한 법적, 제도적 기반은 부재했다.
앞서 의료산업에 일찍 눈을 뜬 태국과 싱가포르 등이 국가의 전폭적 지원 아래 관련 시장을 잠식해 나가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풍부한 인프라와 잠재력을 발휘할 환경도 갖추지 못했다.
그나마 정부가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의료 해외진출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서울대병원의 UAE 왕립병원 위탁운영과 서울성모병원의 건강검진센터 설립 등 가시적인 성과를 이뤄냈다.
한국의료 해외수출 기반 마련을 위해 세계시장을 두드린 보건복지부는 그동안의 상황을 ‘500원 신화’에 비유했다.
외국 정부에게 한국의료의 우수성을 알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더라도 그 이후 사업을 추진할 제도적 기반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복지부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故 정주영 회장처럼 ‘자신있으니 맡겨달라’는 배짱 전략에 의존해 왔다”며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45년 전과 판이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고 주변국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해 새누리당 이명수 의원을 통해 ‘국제의료사업지원법’을 발의했다.
특히 현행 의료법은 국내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주요 고려사항으로 두고 있어 국제의료사업 활성화에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때문에 외국인환자 유치 및 의료해외진출 활성화를 위한 별도의 법률을 제정해 금융, 세제, 정보제공 등 종합적 지원을 통한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사업 추진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이미 싱가포르, 태국, 캐나다, 일본, 영국, 오스트리아 등이 의료 해외진출 활성화를 위한 정책 및 입법지원에 나서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에 이번 입법은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였다.
산업화 날개 달아줄 法(법) 제정
국제의료사업지원법에는 외국인 환자유치 및 의료 해외진출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규제완화 등 여러 제반 사항이 담겼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보험회사의 외국인 환자유치 허용이 담겼다. 보험사들의 유치사업 허용을 통해 더 많은 외국인 환자를 유치한다는 취지였다.
또 다른 규제완화로 외국인 환자 유치를 위한 의료광고와 해외 원격의료가 제시됐다. 국제공항 등 외국인 밀집 장소에서 외국어로 된 의료광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의료인 간 원격의료 이외 외국인 환자의 건강?질환 관찰, 상담 등을 위한 원격의료를 가능하도록 했다.
국제의료산업 육성을 위한 지원책도 마련됐다. 외국인환자 유치실적, 전문인력 보유현황 등을 고려해 우수 유치업자를 지정하고 국내외 홍보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또 유치사업자 및 진출기관이 국제의료사업을 하는 경우 해당 사업에 대해 중소기업자에 적용되는 지원을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국제의료사업에 대한 정보제공, 전문펀드 조성, 금융·세제 지원 및 국가의 지원사업 근거가 마련됐다.
외국인 환자 유치등록 업체는 2014년 총 3869개로, 의료기관이 2688개, 일반업체는 1181개이며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우리나라 의료기관의 해외진출 현황은 중국, 미국 등 19개 국가 125개 기관에 달한다.
산업화에 편중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시장질서 유지책도 제시됐다. 유지업자는 보증보험을 의무적으로 가입도록 하고, 외국인환자 대상 설명의무도 부과했다.
특히 과도한 수수료 부과 등 중대한 시장질서 교란행위를 제한하는 한편 실태조사 등을 상시로 실시해 그 결과를 공개한다는 방침도 포함시켰다.
이 외에 외국인 환자 유치실적 보고를 의무화하고 의무 위반시 과태료를 부과토록 했다. 신고자 포상제도, 미등록자와 거래금지 등의 조항도 담겼다.
복지부 관계자는 “정부는 제도적으로 의료산업 활성화를 뒷받침해 나갈 것”이라며 “세계시장에서 한국 의료산업이 주목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법”이라고 말했다.
1년여 산고(産苦)… 국부(國富) 창출 기대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법안 발의 후 입법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국회 문턱이 닳도록 의원들을 찾아 법안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국제의료사업지원법을 현 정부의 대표적 경제활성화법으로 지정하고 여야의 초당적 협조를 수 차례 당부했다.
하지만 국제의료사업지원법 진행은 녹록치 않았다. ‘의료산업화’에 극도로 예민한 야당과 시민단체들의 반발이 이어지며 초반부터 난항을 예고했다.
야당은 지난 4월 아예 새로운 법률안을 내놨다. 새정치민주연합 최동익 의원이 발의한 ‘의료 해외진출 및 외국인환자 유치 지원에 관한 법률안’은 기존 발의된 법안 내용과 적잖이 배치됐다.
복지부의 조율작업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 당초 이명수 의원이 발의한 법률안과 최동익 의원의 법률안 중 민감한 사안부터 줄여가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보험회사 해외환자 유치업 허용 등 핵심 쟁점을 삭제하는 조건으로 여야 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9대 국회 회기 막판 여야가 국정 교과서 문제 등으로 극도의 신경전을 벌이며 국제의료사업지원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9부 능선을 넘었다”며 장밋빛 전망을 내놨던 복지부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실제 지난 11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는 국제의료사업지원법에 대한 야당의 제동이 계속됐고, 무려 4~5차례의 수정작업이 진행됐다.
복지부 입장에서는 이번 회기에 처리되지 않으면 20대 국회로 이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하며 막판까지 국제의료사업지원법 입법화에 매달렸다.
결국 야당의 요구가 대폭 반영된 국제의료사업지원법은 진통 끝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와 법제사업위원회를 거쳐 본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복지부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서 향후 2년 간 약 6조원의 부가가치와 연간 약 5만명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이번 법률안 제정으로 의료기관의 해외진출을 지원하고 외국인 환자의 권익과 국내 의료 이용 편의를 제고할 수 있게 됐다”며 “한국의료의 세계화를 모색하는 기틀이 마련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국제의료사업지원법은 최동익 의원이 발의한 법안과 병합돼 ‘의료 해외진출 및 외국인환자 유치 지원에 관한 법률안’으로 명칭이 최종 수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