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계도 무풍지대 아닌 '갑을(甲乙) 문화'
남양유업서 촉발 대한민국 강타, 인턴·레지던트·펠로우 서글픈 '을'
2013.07.19 19:28 댓글쓰기

[기획 1]‘갑의 횡포-을의 희생’. 나눔의 미학을 기저에 둔 경제민주화 열풍이 불기도 전에 우리사회는 ‘갑을관계’ 충격에 빠져 버렸다. 곪고 곪아 터진 상처라지만 갑과 을의 역학관계는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단초가 된 남양유업 사건은 어찌보면 조직과 조직, 사람과 사람 등 이 사회 모든 관계에 적용돼 왔는지 모를 일이다. 조금만 시각을 좁히면 의료계에도 갑을의 역학은 부지기수다. 칼자루를 쥔 자와 무방비로 노출된 자의 동기는 이미 오래 전 시작됐다. 제2의 ‘라면상무’, ‘조폭우유’ 사건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곳이 바로 의료계인 셈이다. 같은 의사가운을 걸치고 있지만 엄연히 서열이 존재하는 전공의·임상강사·교수들, 울며 겨자 먹기로 글로벌 기업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의료기기업계, 다국적 제약사로부터 오리지널 제품 들여오기 눈치전쟁에 나선 국내 제약사들을 조명해봤다.[편집자주]

 

대학병원 내 흰 가운을 걸친 의사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갑을 관계가 성립한다. 인턴, 레지던트, 임상강사, 교수 등으로 구분되는 직급 때문이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교수 아래에는 전공의와 임상강사들의 서러운 ‘을(乙) 살이’가 존재한다.


특히 ‘펠로우’라 불리는 임상강사는 수술 어시스트, 회진과 같은 본인 업무를 넘어 지도교수 논문작업 및 잡무, 심지어 운전기사 노릇까지 떠맡고 있기에 ‘펠노예’라고 불리기도 한다. 수십년 이어져온 관행이지만 우리 의학계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들이 을(乙) 살이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대학병원의 교수자리, 개원의로서의 성공 열쇠는 의사로서 실력이지만, 그 자리까지 가기 위한 발판을 닦는 데 지도교수 입김이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실제 한 대학병원의 32세 임상강사A씨는 “설령 부당하다고 해도 내 자리를 마련해 줄 사람이니 별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어 A씨는 “하다못해 봉직의를 가도 지도교수가 누구인지에 따라 이 바닥에서 대우가 천차만별”이라고 전했다.


최근 경기침체로 인한 교수직 임용과 개원 문이 좁아지다 보니 ‘OO교수 밑에서 배운 임상교수’라는 타이틀이 하나의 스펙이 된다는 것이 의료계 정황이다. 이 같은 상황에 임상강사들은 교수라는 갑(甲) 앞에 묵묵히 폘노예로 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제식 교육환경 원인…논문 작업에 운전기사 노릇까지 등


병원 내 도제관계에서 을(乙) 입장에 처하기는 인턴과 레지던트도 마찬가지다. 먹이사슬 가장 하위에 있는 인턴의 을(乙)생활은 고달프다 못해 위험천만하다.


이들에게는 지도교수뿐만 아니라 자신들보다 높은 연차의 선배들이 모두 갑(甲)이다. 지난 2월에는 한 대학병원의 레지던트가 인턴에게 의약물을 무단 투여한 사실이 적발돼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해당 병원의 진상 조사 결과 이 레지던트는 임상시험을 핑계로 인턴에게 조영제와 페니라민, 뮤테란을 주입했으며, 피해 인턴은 1시간가량 정신을 잃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례가 빈번한 것은 아니지만 후배 인턴이 선배 레지던트의 부탁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라는 의료계 사람들의 중론이다.


그렇다고 레지던트가 마냥 갑(甲) 위치에 서는 것도 아니다. 이들 역시 선배와 교수 앞에서는 폭행과 성희롱 사건 등에 휘말리는 슈퍼 을(乙)이다.


이 같은 환경에 지난 1월 열린 대한전공의노동조합 총회에서는 전공의 인권보호를 골자로 한 '전공의노동조합 결의문'이 채택되기도 했다.


결의문 내용 중 ‘인권유린·폭언·폭행·성폭력 근절’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은 이들이 겪는 서러움을 방증해준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의 전공의 B씨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으로서 도제관계가 정립돼 있는 것이 관행이다. 배우는 입장에서는 위에 찍히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다”고 전했다.


입소문 때문에 부당하거나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것도 전공의와  간 갑을관계를 고착시키는 요인이다.


실제 작년 8월에는 유명 대학병원의 정형외과 교수가 별다른 이유 없이 전공의들에게 무차별인 폭행을 가해온 사실이 환자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 폭력 아래서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전공의들을 보다 못한 환자가 병원 내 고객소리함에 민원을 넣었던 것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 경문배 회장은 “폭력 등의 상담을 의뢰해 와도 자기 노출을 꺼리기 때문에 해결해주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 제기를 하기 보다는 속으로 참고 혼자 묻어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이어 경 회장은 “이전보다 많이 변화됐지만 여전히 전공의는 약자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은 하기 힘들다. 그동안 묵인돼 온 관행들과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병원 내 갑을관계에 대해 교수들은 난색을 표했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 C교수는 “과거에 도제식 교육과 달리 최근에는 이런 관계들이 사라져 갑을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임상강사 추천권 역시 실력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지 불합리하게 교수 마음대로 자행될 수 없는 것이 요즘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여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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