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력 잃은 연구중심병원 운명 '잿빛'
2조4000억원 예산 불투명…정부 말 바꾸기에 병원들 '분통'
2013.01.15 11:53 댓글쓰기

획기적이었다. 진료 비중이 절대적인 병원 역할을 연구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발상은 적잖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반신반의 했지만 방향성에는 공감했다. 진료가 연구를 위한 수단이어야 함에도 목적이 돼 버린 현실에 대한 자성도 있었다. 정체성 전환을 위한 유도기전도 충분했다. 연구 기능 강화에 따른 진료수입 감소분을 보전할 수 있는 막대한 예산지원 약속은 일선 병원들에게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다는 장밋빛 꿈을 실어 줬다. 즉각 의료산업 패러다임 변화에 순응하기 위한 병원들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변화의 주인공으로 발탁되기 위해 대대적으로 연구 인프라를 확충하고 공모를 기다렸다. 하지만 캐스팅 소식은 함흥차사(咸興差使)였다. 2011년 상반기에 한다던 공모가 하반기로, 또 그 이듬해로 미뤄지기를 수 차례. 2년 여의 기다림 속에 최근 선정조건 등 세부방안이 발표됐다. 하지만 2조4000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예산 얘기는 생략돼 있었다. 병원들은 일제히 동요했다. 통탄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들 병원에게 “믿고 따라와 달라”는 정부의 말은 더 이상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당장 내년 시행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동력을 잃은 연구중심병원, 그 운명은 어떻게 전개될까?

 

완벽한 시나리오 ‘의료강국 대한민국’ 지향


지난 2011년 6월 한국 의료계 판도를 완전히 뒤엎을 의료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름하여 ‘연구중심병원법’으로 불리는 보건의료기술법 개정안.


이 법안의 핵심은 연구중심병원으로의 전환이다. 말 그대로 진료보다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병원을 만들겠다는 얘기다.


진료를 바탕으로 축적된 지식을 첨단보건의료 연구개발과 사업화로 연계, 보건의료산업 발전을 선도하는 세계적 수준의 병원 육성이 법안의 핵심이다.


기존에도 ‘선도형 연구중심병원’이라는 제도가 있었지만 특성화 연구 활성화를 위한 목적지원 사업이었다면 새롭게 추진되는 연구중심병원은 병원 자체를 연구중심기관으로 전환하는 사업이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글로벌 선도 연구중심병원 육성은 이해 당사자인 병원, 국민, 국가 측면에서 상당한 파급효과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했다.


우선 병원 입장에서는 기존의 진료중심 체제에서 연구중심으로 전환할 경우 유·무형의 인센티브를 기대할 수 있다.


실제 정부는 선정 병원의 공중보건의사에 대한 병역특례 제도 도입, 각종 세금과 경비지원, 건강보험 지원 등 굵직한 당근책을 제시했다.


특히 연구중심병원의 효율적 정착을 위해 2조4000억원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판단, 정부 1조원과 민간 1조4000억원의 예산까지 책정했다.


병원들로서는 진료 기능을 줄이더라도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이를 통해 수입원을 다각화 시켜 재투자 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가능하다고 복지부는 전망했다.


국민 입장에서도 연구중심병원을 통해 의료의 질 개선 및 의료비 지출 경감 효과를 극대화 시킬 것으로 내다봤다.


정부 역시 의료산업을 육성하고 건강보험 재정 등에 실질적인 개선효과를 기대하는 등 이해 당사자 간의 긍정적 파급효과를 통한 제도 정착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복지부는 이러한 밑그림의 벤치마킹 사례로 미국 하버드의대와 텍사스 휴스턴 메디컬센터 및 영국의 임페리얼대학병원, 일본의 와세다대학병원 등을 꼽았다.


실제 하버드의대는 세계 최대 연구중심병원으로, 연간 6억 달러의 연구 관련 수익을 얻는다. 이는 병원 총 수입의 25%를 차지한다. 이 곳에는 병원을 중심으로 다국적 제약사 등 1000여 개의 바이오 기업이 운집해 있다.


텍사스 휴스턴 메디컬센터 역시 지역 내 의료클러스터를 형성했다. 현재 휴스턴 지역 경제의 25%를 차지한다. 지역 내 엠디엔더슨 암센터는 세계 최고 규모의 연구 프로그램을 보유중이다.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상업화 촉진 부서가 있어 기술의 수익성, 적합성, 실행가능성 등을 검토한다.
복지부는 이들 병원의 성공 사례와 같이 국내 유수 병원들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창출, 산업계에 확산시키는 지식산업의 보고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검토만 2년 째…표류하는 정책


연구중심병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9년부터다. 서울의 빅5 병원들과 주요 병원 핵심 인사들이 모여 병원계의 차세대 먹거리 산업을 걱정하는 자리가 있었다.


이미 해외병원과 글로벌 시장 조사를 마친 바 있는 병원 관계자들은 연구중심병원이야말로 한국 대형병원이 다음 세대에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맞춰 2009년 12월 보건복지부 연두 업무보고에서 병원의 연구 역량 강화를 위한 위원회가 열렸다. 곧 이어 병원 현장 전문가 간담회가 개최됐고, 이듬해 1월 복지부 내에 연구중심병원 육성 TFT가 구성됐다.


금방이라도 연구중심병원 사업이 진행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일선 병원들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기존에도 연구 기능 강화를 고민해 오던 대형병원들의 움직임이 더욱 도드라졌다.


서울아산병원은 2009년 8월부터 지상 16층, 지하 4층의 대규모 신연구관 설립에 착공, 지난해 완공했다.

이 연구관에는 다나파버 암 연구센터 등 해외 유명 연구기관이 입주를 하면서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등 철저히 진료가 아닌 연구가 수행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제약사와 벤처기업, 중개연구센터, 임상시험센터 등도 속속 입주하고 있다. 공동연구기업으로는 삼양사, 한미약품, 케미존, 유한양행, SK케미칼, 일동제약 등이 예정돼 있다.


삼성서울병원도 KIST, 메이요클리닉 등과 공동연구 협약을 맺었고 연구중심병원을 염두한 대대적 조직개편도 단행했다.


특히 서울아산병원과 마찬가지로 2015년까지 일원역 인근 1만1169㎡ 부지에 줄기세포 및 재생의학 등을 집중 연구하는 삼성융합의과학원 건립을 추진 중이다.

서울대병원 역시 의생명연구원 부지 옆에 ‘제2의 생명연구원’을 짓기로 결정하는 등 연구중심병원으로의 체제 전환에 심혈을 기울였다.


연세의료원도 핵심적인 연구 인프라 구축을 위해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1996년 임상의학연구센터를 설립해 교원들의 연구를 촉진하고 신진 연구 인력을 양성해 왔다.


오는 2월에는 에비슨생명연구센터가 문을 연다. 연세의료원은 지하 5층, 지상 6층, 약 1만2000평 규모의 이 연구센터를 의생명공학 융합 연구의 허브로 키우겠다는 복안이다.


가톨릭중앙의료원은 연구중심 의료기관으로 체질 개선을 위해 인프라 구축에 힘쓴다는 계획이다. 연구부원장직 신설이 대표적 사례다. 뿐만 아니라 지난 1997년 국내 최대 규모로 개원한 가톨릭의과학연구원을 연구 활동에 최적화된 환경으로 재편할 예정이다. 기존의 동물실험실 확장은 물론 면역치료 연구도 강화한다.


이처럼 일선 병원들이 연구중심병원 주인공으로 낙점받기 위해 바쁜 움직임을 보인 반면 정작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던 정부의 제도화 속도는 더뎠다.


당초 2010년 하반기 구체적인 사업계획 등을 마련하고 이듬해 상반기 선정작업을 마무리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해가 바뀌었지만 연구중심병원에 관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복지부는 ‘조만간’이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 명확한 시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애타게 공모 소식만을 기다리던 병원들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연구중심병원 사업을 하기는 하느냐’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先 전환 後 지원정책 급변…병원계, 당혹감 감추지 못해


문제는 ‘돈’이었다. 복지부가 추산한 연구중심병원 사업비는 총 2조3966억원. 이 중 정부가 9763억원을, 민간이 1조4170억원 충당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예산 확보가 녹록치 않았다.


워낙 큰 사업인데다가 실효성 문제까지 얽히면서 난항을 거듭했다. 실제 복지부는 연구중심병원 예산 확보를 위해 지난해 4월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의뢰했지만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1년 안팎이면 정부기관 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결과가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2년이 가까이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예산 확보가 난항을 거듭하면서 복지부도 난처해지기 시작했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지난해 대상기관을 선정하고 본격적인 제도 운영에 돌입했어야 하지만 예산이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차일피일 미루던 복지부는 지난 8월 연구중심병원 지정기준을 전격 발표했다. 하지만 예산은 여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관련 고시에는 연구중심병원 선정 기관에 대한 세제혜택은 물론 연구비 지원 등의 내용을 포함시켰다. 이 때까지만 해도 재정적 지원은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지난 12월 6일 열린 연구중심병원 지정사업 안내 설명회에서 복지부가 “예산 지원은 없다”고 폭탄 발언을 하면서 병원계에 충격을 던졌다.


당시 설명회에 나선 복지부 보건산업기술과 허영주 과장은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되더라도 예산 지원을 기대하면 안된다”며 사실상 재정적 지원 백지화를 선언했다.


‘장밋빛 꿈’을 안고 2년 여를 준비해 온 병원들은 일제히 동요했다. 연구중심병원 지정을 위해 이미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인원까지 채용한 병원들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았다.


병원들이 강하게 반발하자 복지부는 “예산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예비타당성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해명했지만 병원들의 공분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예산도 확보해 놓지 않은 상태에서 미래 청사진만을 믿고 정책을 수립, 추진했다는 비난이 연일 계속됐다. ‘말바꾸기’ ‘뒤통수’ ‘배신감’ 등의 원색적 표현도 등장했다.


병원들 반발에 대해 복지부는 예산 확보의 고충을 토로하면서도 ‘돈’에 집착하는 일선 의료기관들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병원들이 너무 돈에 민감해 하는 것 같다”며 “재정적 지원이 일시적 효과에 그치는 사례를 수 없이 봐 왔다”고 말했다.


이어 “연구중심병원 취지에 공감한다면 먼저 전환을 시도하고 그에 따른 예산지원을 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복지부는 지난 11월 26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구중심병원 지정을 위한 신청 접수를 진행했다. 워낙 민감한 사인인 만큼 지원현황은 공개하지 않았다.


당국은 지속가능한 연구행정체계 구축과 개방형 연구인프라 확보, 글로벌 수준의 연구 역량 등을 평가해 금년 3월 최종 선정기관을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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