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 분위기 확연…학회 '개선방안 시급'
리베이트 쌍벌제·공정경쟁규약 등 학술활동 위축 도미노
2013.01.24 11:15 댓글쓰기

 

[기획 4]

#1. 한 대학병원 교수는 요즘 정신이 없다. 내년 개최 예정인 국제학회의 사무총장, 학회장 등 여러 직책을 맡고 있는 터라 학회 주머니 사정을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약회사를 비롯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연락해 설명하기 바쁘다. “먼저 연락해 오는 것은 꿈도 안 꾸고, 긍정적으로 결정을 해주기만 하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속마음이다.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자화상에 이따금씩 놀라고 헛헛한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쌍벌제가 시행된 지 2년 정도 흘렀다. 그 사이 의사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특히 학회 곳간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쌍벌제 및 공정경쟁규약 등으로 인해 재정 상황이 예전 대비 나빠진 것이 사실이다. 학술대회에 외국 석학을 초청하거나 해외 학회에 참석하는 과정도 까다로워졌다.


내년 서울에서 국제학회 개최를 앞두고 있는 한 학회 총무이사는 “이제 전화 돌리기는 일상”이라면서 “국내 제약회사의 경우 약가인하 정책까지 더해져 경쟁력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왜 국제행사에 지원해야 하냐는 식의 반응도 있다. 다국적 제약사들은 그나마 VIP들을 데려오면 관심을 보인다”고 현실을 전했다.


참가국 회원들의 참석을 독려하고 눈도장을 찍고자 해외를 찾아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를 위한 단독 출국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해외 학회에서 발표 기회가 생겨 겸사겸사 떠난다. 병원에는 개인 휴가를 내야하고, 학회에서는 지원마저 충분치 않아 이래저래 힘든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해외 학회장을 비롯 VIP들의 한국행을 성사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메이저나 질환 중심 학회가 아닌 곳들은 어렵게 인맥을 통해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의학 수준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국제적 네트워크를 쌓을 기회가 줄어들고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올해 국제행사를 치른 학회 이사장은 “해외 연수 등을 거치면서 쌓인 회원들의 인맥을 동원해 석학을 섭외했다. 가장 기본적인 것만 지원해 줄 수 있다고 툭 터놓고 얘기했다”면서 “학술적인 흥미가 없다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국제 사회에서 한국 의학이 어느 정도 자리매김하고 있기에 그나마 가능했던 일”이라고 회상했다.
특히 의료계에서는 “제약업계의 학회 후원은 결국 상생과 의학 발전 등을 위한 중요한 요소”라면서 “다국적 기업의 경우 사회 환원 식의 의미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2. 지방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몇군데 컨벤션과 호텔 등을 정해 사전 답사를 했다. 컨벤션은 커서 좋긴 하지만 숙박을 따로 잡아야 한다는 점이 아쉬웠고, 호텔은 대관료가 너무 비쌌다. 지방에서 행사를 하게 되면 많은 분과 학회들이 원하는 만큼 방을 열 수 없어 항상 애를 먹는다. 종합학술대회의 지방 개최는 늘 고민거리다.

 

학회들의 학술대회 장소 찾기가 마땅치 않다. 규모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각기 나름의 이유로 장소 섭외에 애를 먹고 있다. 분과 학회 등과 함께 종합학술대회를 치르는 곳이라면 상황은 더 좋지 않다. 대규모 인원이 들어갈 만한 곳이 많지 않는 등 선택의 폭이 좁아 대부분 서울에서 치른다.


더욱이 갈수록 비싸지고 있는 대관료로 인해 호텔 개최를 포기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호텔을 선호하는 이유는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행사는 대학 및 병원 강당을 이용하는 사례가 예전보다 부쩍 많아졌다.


매번 서울 코엑스 컨벤션을 이용해 왔던 학회는 당장 2013년 학술대회 장소를 잡지 못해 좌불안석이다. 이 학회 신임 이사장은 “내년에는 국제적 행사로 인해 코엑스에서 일체 학술대회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대규모 인원이 수용 가능하고 지리적 이점을 갖춘 장소를 새로 물색해야 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개최된 의학 관련 컨벤션(Convention) 행사는 329건이다. 예산 규모별로 살펴봤을 때 1억 이상 5억 미만이 총 326건으로 대다수였으며, 5억 이상~10억 미만이 소요된 의학 행사도 3건이나 됐다.


참가 규모별로는 대부분(326건)이 250~500명 사이였다. 500~1000명이 84건, 1000~2500명이 83건으로 그 뒤를 이었다. 개최기간은 3일 119건, 4일 72건, 2일 60건 등이다. 컨벤션 행사에 참가한 외국인 수 역시 의학 분야가 절대적으로 많았다. 지난 해에만 1만6406명의 외국인이 다녀갔다.

 

#3. 경쟁을 통해 세계학회를 유치하는 학회들은 감회가 남다르다. 그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자부심도 크다. 그러나 밥상을 차리기까지 준비과정이 너무 고되다. 특히 꽉 막히고 애매한 규정 탓에 재정적 어려움이 따랐다. 세계학회 유치의 경제적 가치 평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주길 바란다.

 

일반 학술대회가 아닌 세계학술대회와 같이 규모가 큰 행사를 유치하는 데는 실로 많은 재정이 투입된다. 국제적 규모의 행사를 위한 맞춤형 지원책이 없다는 것은 유치하는 입장으로선 큰 아쉬움이다. 정부 차원에서 컨벤션 문화를 활성화시킨다고 하지만 피부에 와 닿는 경우가 드물다는 전언이다.


대한의학회에 “국제학술대회 유치를 위해 국가 차원의 특별한 지원 대책 마련”을 촉구한 학회의 사례를 봐도 그렇다. 이 학회는 세계학술대회를 유치하고자 주변국의 지지 서신 요청, 인적 교류, 유치 발표 슬라이드 준비 등을 모두 꼼꼼히 준비해 표를 얻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정작 걸림돌은 따로 있었다.


세계학술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은 대학병원 교수는 “수 천 명이 참석하는 세계학술대회를 유치하고자 하는 학회들로서는 학술대회 장소의 비싼 대관료와 숙박료 그리고 공정거래위원회가 엄격히 제한을 둔 후원업체 전시비용 등 많은 장애물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이번 선정과정에서 아랍에미리트의 경우 문화관광부가 나서 참석자 1박 숙박에 대해 1불 씩을 별도로 세계 학회에 기부하고 에미리트항공사를 이용할 경우 특가 항공료를 약속하면서 학술대회를 위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사들에게 약속했다”며 국내와는 다른 분위기를 전했다.


현재 한국에서 개최되는 의학 분야 국제회의는 꾸준한 증가 추세다. 국제사회에서 한국 의학계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인 셈이다.


한국관광공사가 분석한 2004~2011 국제회의 개최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04년 24건에 불과했던 국제회의는 지난 해 187건으로 껑충 뛰었다. 특히 지난 해 의학 분야 국제회의를 통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은 5만2972명에 이른다. 2010년 2만5644명, 2009년 1만7711명 등에 비해 큰 폭으로 상승한 수치다.


관광을 비롯 경제적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예측되는 이러한 국제 행사를 위해서는 별도 지원 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유치 경험이 있는 의사들은 “국제ㆍ세계적 행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파급 효과가 클 것”이라면서 “국가에서는 지원 체계를 마련하는 한편 지지하고 도움이 될 만한 부분에 대한 다각도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4. 쌍벌제, 결국은 어디까지가 마케팅이고 리베이트 인지에 대한 것이다. 의사들의 자정 의지와 노력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무엇보다도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제약업계와 의료계 모두가 상생ㆍ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언제까지 누르는 정책만 할 것인가.

 

이처럼 전반적으로 학회들의 주머니가 얇아지다 보니 자구책 찾기에 나서는 모습이 많아졌다. 국제행사로 격상시키려는 움직임과 등록비 인상, 새로운 기부 문화 구상, 재단법인 설립 등이 그 예다.


회원들의 여론을 바탕으로 조금씩 등록비를 인상해 나가거나 새로운 활로 개발을 통해 기금모금에 나선다. 또한 재단법인 설립을 통해 후원업체와의 관계 설정을 보다 투명하게 만들어 부담을 줄이고 있다.


대한의학회 배상철 학술진흥이사는 “의료계의 자정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학회 활동이 제약받지 않도록 불합리한 점 등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의학회 김동익 회장 역시 서신 발송을 통해 “공정경쟁규약으로 인해 작년부터 의학계는 큰 어려움과 변화를 겪고 있다. 공정경쟁규약은 리베이트 방지를 위해 발효되고 있지만 학회의 학술활동과 관련된 사항이 많아 학술 진흥 차원에서 이러한 규약이 우리나라 의학발전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고 알렸다.


그는 또한 “공정경쟁규약 개정과 쌍벌제 적용에 따른 여러 문제점이 대두되는 등 정부기관과 협조가 절실한 사안들이 산적해 있다. 정책적 변화에 대한 의견 수렴을 위해 정부 관련 부서와 많은 대화가 필요한 시기”라면서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정부가 의학회와 회원 학회를 보건의료정책 파트너로서 많은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의료계를 대표하는 대한의사협회 역시 의료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명확한 기준을 설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명확한 기준 확보와 더불어 개선책을 찾기 위한 논의를 하루 빨리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의사협회 송형곤 대변인은 “마케팅의 1에서부터 10까지 모두를 리베이트라고 보고, 양쪽 모두 페널티를 주는 것은 기본적으로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기준이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모호한 상태”라면서 “어디까지 마케팅이고 리베이트인지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결정적 잣대가 없는 상황”이라고 피력했다.


그는 이어 “학술 진흥 부분도 모두 이 같은 문제에서 비롯된다. 의사들이 약을 바꿀 때는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요즘은 환자들이 먼저 이를 캐치해내기 때문에 함부로 그럴 수도 없다”면서 “의학회, 의협 모두 쌍벌제와 공정경쟁규약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들을 공유하고 있으며 정부에 건의를 해왔다. 엄격하게만 규정을 잡아놓으면 발전에 저해가 올 수 있다. 개선점을 도출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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