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잡는 해병대…병·의원 잡는 심평원?
2011.08.16 03:00 댓글쓰기
의료계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법정에서 얼굴을 맞대는 일은 이미 일상다반사가 됐고, 토론회 자리에서는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으며 정책을 두고서는 단체 행동까지 불사하며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다. 심평원의 심사·평가에 불만이 있다며 입을 연 한 대학병원 교수는 “심평원의 목표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평원의 방식을 의료계에 전하는 과정에서 여론수렴은 고사하고 잘못된 기준을 수정하고 보완할만한 장치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했다. 환자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공급자인 의사들에게 일방적으로 칼을 겨누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으며 이에 동조하고 싶지 않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연구실에서 만난 또 다른 교수는 의료계와 심평원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귀신 잡는 해병대, 의사 잡는 심평원”이라는 말로 답에 갈음했다.[편집자주]

삭감 또 삭감…행정소송 범람

‘요양급여비용조정처분취소’. 법원 재판 일정에 하루 한 번은 꼭 등장하는 사건명이다. 피고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원고는 병ㆍ의원이다. 최근 들어 의사들이 진료비 삭감 문제를 두고 심평원과 법원에서 다툼을 벌이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지난 4월, K학원 부속병원은 서울행정법원에 진료비 삭감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심평원이 심방세동 환자 치료를 위해 의료진이 내린 결정을 문제를 삼으며 140여만원 삭감처분을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병원은 심방세동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약물 치료로는 더 이상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판단 하에 ‘고주파 절제술’을 시행했으나 심평원은 이 시술이 ‘항부정맥제 약물치료를 6주 이상 우선 시행해야 한다’는 고시 기준을 만족하지 못했다며 병원이 청구한 급여비를 삭감했다.

변론에 참석한 K학원 관계자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시행된 시술에 대해 고시 기준만을 내세우며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면서 “심평원은 현장에서 환자를 대하는 의료진보다 환자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 관계자는 “삭감비용 140여만원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식이면 앞으로 그 어떤 환자의 생명도 담보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법원은 이 같은 병ㆍ의원들 문제제기에 진료행위의 합리성이 얼마나 확보됐느냐를 중심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다.

일례로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12월 ‘척추 방출성 골절’ 수술을 시행한 모 병원이 심평원을 상대로 제기한 삭감처분취소 소송 판결을 통해 “의사의 진료행위를 합리성이 명백히 결여된 행위, 진료 재량권을 일탈할 행위로 볼 수 없다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의사 행위에 대한 요양급여 지급이 거부돼서는 안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심평원 심사·평가의 기준이 되는 고시에 일부 저촉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의사 치료가 합리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행위에 해당한다면 이를 면밀히 검토해 급여 지급을 판단해야 한다는 결정이다.

"정책 및 심사기준, 건보재정 절감과 연계하지 말라"

지난 5월 15일 대한의사협회 종합학술대회가 열린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는 의료계와 심평원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심평원 심사에 일관성이 없고 의사 재량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지적에 대해 심평원이 “우리가 무소불위 권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냐”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대한임상보험의학회 학술대회 일환으로 마련된 이날 토론회에서 의료계는 한 목소리로 심평원을 성토했다.

연자로 나섰던 차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지영건 교수는 “의료인들은 현행 심평원의 심사 및 평가가 의료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삭감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심사ㆍ평가 기준의 일관성 및 합리성을 요구했다.

의사의 양심과 소신을 인정하고 의사의 진료행위를 재정절감과 연계하지 말라는 주장도 나왔다. 대한의사협회 양훈식 보험부회장은 “의사의 전문적 지식을 활용한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오로지 건보재정 절감을 위한 정책만 양산되고 있다”면서 “양심과 소신을 갖고 진료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피력했다.

서울에 위치한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한 영상의학과 전문의는 “최근 심평원이 전국 의료기관이 보유한 CT, MRI 일제조사를 벌이는 것도 결국은 환자의 안전을 담보한다는 명분하에 정책적으로 재정 안정을 꾀하기 위한 시도”라고 비판했다.

이 전문의는 “영상장비 수가 인하 시에는 아무리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던 전수조사를 수가인하와 연계한 노후 장비조사 차원에서 이제야 시행한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의료계를 무시해도 이렇게 무시할 수는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의사 손, 발 다 묶어두고 의료의 질 제고, 환자 안전 운운하며 연일 삭감통보를 하고 있는데 불합리한 심사기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법원 “급여 인정기준 제정 근거 공개하라”

최근 법원은 급여비용 인정기준 제정 근거와 관련된 행정정보 공개를 거부한 심평원에게 “관련자의 인적사항을 제외하고 급여인정기준 제정 시 활용된 자료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이번 판결로 심평원이 그동안 비공개 대상임을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던 진료비심사평가위원회 회의록 등이 정보공개 대상이 되면서 의료인들의 정보공개 신청에 따른 급여인정기준 문제제기는 더 활성화 될 것으로 보인다.

K의료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어떤 근거로 설정됐는지도 모르는 기준을 설정하고 의사들에게 지키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면서 “기준 설정 과정에서 다수 전문가들의 의견 수렴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라고 심평원의 행보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교수는 “그래도 의학적으로 반박근거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소송으로라도 문제를 풀 수 있지만 이번에 복지부, 심평원이 합작한 당뇨병 치료제 투약기준 변경은 하소연할 곳도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뇨병 환자에 대한 대규모 추적 관찰 등 국가적 차원의 연구가 없어 정부의 결정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그는 “우리가 투약기준 변경을 추진할만한 국내 연구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한데 심평원은 어떤 근거에서 투약기준 변경 안을 만들었는지 아이러니 한 일”이라면서 “국민병이라는 당뇨병이 이런데 다른 부분들이야 오죽하겠냐”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의료계의 쏟아지는 불만에 대해 심평원도 할 말이 많았다. 대한의사협회 종합학술대회에서도 심평원은 의료계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기관”이라는 지적에 “심평원의 제일 중요한 고객은 국민이고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보험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맞받아쳤다.

‘요양급여 심사 및 평가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의료계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심평원 이규덕 평가위원은 “의료계는 심평원의 심사 및 의료 질 평가를 삭감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각자의 입장에 따라 비판과 우호적인 의견이 갈리고 있어 심평원의 심사가 일방적이라는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 평가위원은 “최근 발표된 보고서 중에는 효과가 없는 불필요한 진료가 30%에 육박한다는 조사가 있다”면서 “병·의원들도 진료의 옳고 그름을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0여년 사이 급여비가 4배 이상 올랐는데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다 보니 어떤 정책이든 수가문제로 결론이 도출되고 있다”면서 “하지만 이는 재정을 다루는 건강보험공단과 의료계가 상대가치 문제를 두고 협의해야 할 사항”이라고 심평원을 향해 쏟아지는 화살에 억울함을 표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원천적으로 의료계와 심평원 사이에 대화 통로가 단절돼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면서 “상호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심평원 "억울-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보험 지속성"

대한의사협회 양훈식 보험부회장은 “심평원 본원 및 지역에서 평가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지만 21명의 위원 중 의료계는 단 2명이고 절반은 정부 관계자”라면서 “의료계 몫을 6명 이상으로 확대해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 의료계 인사는 “심평원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충분한 공감이 가지만 전문가들 즉, 공급자인 의사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려는 태도를 보여줬으면 좋겠다”면서 “그래야만 의사들의 노동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이뤄지고 심사에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도 사라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연구실에서 만난 모 대학병원 교수는 “최근 심평원이 부당청구 방지를 위한 의료계 교육시스템 구축방안을 발표한 것으로 안다”면서 “어떤 식으로든 의료계와 대화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만 심평원이 주장하고 있는 건강보험 지속성이라는 목표달성도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목련은 팝콘처럼 피었다가 바나나 껍질처럼 진다’는 말이 있는데 그간 우리 의료계는 팝콘처럼 많은 성과를 내왔고 인정을 받아왔다”면서 “의료계와 심평원이 합심해 우리나라 의료발전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바나나껍질을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고 심경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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