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血) 마르는 '대한민국' 전쟁 중인 '의료계'
2011.08.22 03:33 댓글쓰기
국내 혈액부족은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다. 겨울철 한파, 여름철 폭염으로 인한 헌혈급감 사태를 걱정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이제는 만성화됐다. 특히 수혈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늦가을과 겨울에는 혈액 보유량이 모자라서 수술이 연기되는 사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비교적 혈액 공급이 원활하다는 최근에도 재고량이 3일분 이하로 떨어지면서 일선 병원에서 수술이 연기되는 등 혈액부족에 따른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혈액재고 상황은 대량 출혈 및 수술에 사용되는 적혈구 농축액과 백혈병환자에게 사용되는 혈소판농축액도 2일분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혈액검사가 끝나지 않아 바로 병원에 공급할 수 없는 양을 제외하면 전국에 적혈구 농축액이 1일분도 안 된다. 혈액형별로도 큰 편차를 보여 O형과 A형 혈액이 가장 적으며, 그동안 적정재고가 유지됐던 B형과 AB형 혈액도 2.5일분, 0.3일분에 머물러 바닥을 보이고 있다.

전국 대부분의 혈액원에서 병원의 요청에도 혈액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빈반히 발생하는 상황이다.실제 여의도 성모병원과 고대구로병원 등 서울 서부지역 병원에 혈액을 공급하는 서울서부혈액원의 경우 병원에서 요청이 오는 혈액의 50% 이하로 공급하고 있다. 타 지역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아 부산혈액원의 경우 병원 요청량에 크게 못 미치는 혈액을 공급하는 모습이다. 병원에 혈액을 공급하는 부산혈액원 공급팀 관계자는 “지속되고 있는 혈액부족으로 병원이 자체 혈액재고 유지를 위해 과다하게 요청하기도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부산지역의 혈액부족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혈액 부족량은 점차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수요량과 공급량이 같은 2002년을 기점으로 혈액공급량은 매년 감소, 올해는 혈액 수요량 약 400만 유닛 중 25% 정도인 91만 유닛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2030년에 가서는 수요량이 약 500만 유닛인데 반해 부족량은 50%가 넘는 약 285만 유닛에 이를 것이라는 연구 결과는 앞으로 다가올 ‘혈액대란’을 예고하기에 충분하다.

대형병원보다 심각한 동네의원…"수급 시스템이 문제"
혈액 수급에 대한 불안감은 대형병원보다 동네 의원들이 더 크다. 수혈에 필요한 혈액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 개원가는 급한 수술까지 발목이 잡혔다. 수술시 필수 요소인 혈액 문제로 의원급 병원들 중 수술이 많은 산부인과, 정형외과는 응급상황에서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상시 응급실이 가동되는 대형병원과 달리 응급환자가 불규칙적으로 내원하는 개원가의 경우 혈액을 확보해 놓고 환자를 맞이하기 쉽지 않다.

일부에서는 혈액 수급 문제로 진료과목 존폐마저 고려하는 상황이다. 수술 중 혈액 부족은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요인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의원급 의료기관들은 수술에 들어갈 때마다 응급상황을 고민해야 하는 실정이다.한 산부인과 개원의는 “혈액 수급량이 부족한 것보다 응급상황에서 곧바로 쓸 수 있는 혈액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즉 혈액 확보가 어렵다는 게 아니라 응급 상황에서 필요한 혈액을 구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심지어 일부 병원에서는 노골적으로 ‘피가 부족하니 지정헌혈자를 구해오라’고 환자 가족에게 요구하는 경우까지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개원가의 혈액부족 현상은 혈액 공급보다 ‘수급 시스템의 문제’라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혈액 적합성 검사(Cross Matching)를 혈액원이나 대형병원에서 제대로 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실제 저수가와 인력 확보, 비용 소요 등의 이유로 대형병원에서도 혈액 적합성 검사를 안하는 곳이 늘고 있다.

응급상황시 환자의 피를 들고 혈액 적합성 검사가 가능한 곳을 찾아 돌아다녀야 하지만 검사를 해주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개원가의 하소연이다. 게다가 혈액원도 적합성 검사 의무가 없는 데다 혈액 사고시 책임이 귀속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적합성 검사를 피하는 실정이다.

서울의 한 정형외과 원장은 "임상병리사를 고용할 수 없는 의원급은 혈액원이나 대형병원에 적합성 검사를 의뢰해야 하는데 최근에는 거의 안해주고 있어 곤란하다"면서 "외부 임상병리 해주는 곳을 찾아 전전긍긍하는 상황이 늘어 수술을 줄일지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만성화된 혈액 부족 ‘근본적 원인은 뭐’
환자단체 및 의료기기업계는 응급실 등에서 환자의 상태에 대한 세밀한 판별 전에 우선 혈액백부터 꽂는 처치 경향을 지적했다. 수혈용 혈액은 모두 환자부담이기 때문에 이 같은 상황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응급센터 등에서 계속되는 출혈로 인해 혈액학적으로 불안정한 환자는 조기 수혈이 필요하다. 하지만 불필요한 수혈을 줄이는 것이 환자의 사망률을 감소시킨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제시되고 있는만큼 응급실 의료진의 정확한 판단이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 환자단체 관계자는 “빠른 수술적 처치와 지체 없는 수혈은 출혈성 쇼크에 빠진 중증외상환자의 치료에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그렇치 않은 경우에 무조건적으로 수혈이 선행되고 있는 점은 문제”라며 “환자 측에서 모두 부담하고 있는 혈액 수가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의료기기업계 관계자는 “무분별한 혈액 낭비를 줄일 수 있는 기기가 있는데도 의료기관에서는 사용을 꺼려한다”면서 “이는 현재 수가체계상 병원 경영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고 의료진들만 번거로워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개원가에서는 ‘혈액 적합성 검사의 낮은 수가와 의료사고 책임 소지’ 등 혈액 공급부족보다는 수급시스템 문제를 지적한다. 현재 검사 보험료는 2870원으로 낮은 수준인데다 혈액 사고가 발생하면 적합성 검사를 시행한 병원에 책임이 귀속되면서 타 의료기관에서 검사를 기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형병원이라고 해도 터무니 없이 낮은 검사비로는 혈액원 운영 자체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적합성 검사를 시행한 병원이 수혈 사고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하는 이중고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헌혈 늘리는 것 외 ‘해결책 없나’
환자단체는 혈액에 대한 수가 조정의 필요성을 언급, 환자의 상태에 대한 선별검사 의무화를 주장하고 나섰다. 해당 기기를 필수장비로 도입하자는 의견도 제시하고 있다.

외상환자에서 수혈은 패혈증의 요인이 되는 등 항상 수혈 부작용을 고려, 수혈여부를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특히 혈액공급이 원활치 않은 현 상황에 수혈이 꼭 필요한 환자에게만 수혈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한 관계자는 “출혈성 저혈량 쇼크의 위험에 처해 있는 중증외상환자를 치료할 때 빠른 수술적 처치나 신속하고 적절한 수혈의 결정은 환자 예후와 직접 연관된다. 하지만 일부 외상환자의 수혈은 패혈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초기 수혈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면 혈액 낭비 방지나 국민 의료비 절감 차원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원의들은 “제도개선 없이는 혈액수급 문제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산부인과의사회는 최근 보건복지부에 혈액 수급에 관한 개선사항을 건의했다. 주 요구사항은 혈액원에서 혈액 적합성 검사를 의무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협회도 최근 이 같은 내용의 ‘혈액관리법 및 혈액관리업무 표준 업무규정’을 개정하라는 내용의 건의안을 복지부에 제출했다. 응급상황시 급박하게 혈액을 요청할 시스템 미비와 혈액을 가져오기 위한 시간 할애로 더욱 힘든 상황이 진행되는 이중고를 해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김재연 법제이사는 “검사 수가 현실화나 혈액 관리 전산화 등은 차치해도, 혈액원에서의 적합성 검사만이라도 의무화가 되면 개원가의 숨통이 틔일 것이다”고 전망했다.

복지부 역시 혈액 수급 개선을 고민하고 있지만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복지부 한 관계자는 “혈액 수급에 관한 개선 사항을 건의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부 검토 중”이라며 “수가 인상, 관련 법 개정, 관련 단체 협의 등 절차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대안 제시는 어렵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댓글 0
답변 글쓰기
0 / 2000
메디라이프 + More
e-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