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정숙경 기자] 환자들이 안전하게 치료를 받고 안정을 취해야할 병원이 오히려 강북삼성병원 임세원 교수 피살, 그칠 줄 모르는 응급실 내 폭행 등 연이은 사건·사고로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여기에 "병원 사람은 조문도 말라"는 유서를 남긴 채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 이어 간호대학 실습 간호조무사까지 자살하며 흉흉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중앙보훈병원에서는 환자가 투신한 사건도 벌어지며 그야말로 병원이 위험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다.
흉기 품고 진료받는 환자, 위험지대 진료실
2018년 마지막 날 발생한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의 충격적인 사망 소식은 의료계를 비탄에 빠뜨렸다.
생각지 못했던 참사에 의료계는 물론 국민들도 불안에 휩싸였고 진료실마저 범행 장소가 되면서 의사들은 극도로 불안감에 떨고 있다.
경찰은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박모(30)씨가 자신의 머리에 폭탄이 설치돼 있다는 망상에 빠져 주거지 근처 마트에서 흉기를 미리 구매한 것으로 조사결과를 발표한 상황이다.
문제는 제2의 임세원 교수 사건을 막기 위해 관련 학회, 의료계, 정부, 국회가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실효성을 거둘 지는 아직 미지수다.
대한의사협회 최대집 회장은 지난 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긴급 현안보고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진료실 폭력에 대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진정성 있는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응급의료법 개정안 국회 통과 불구 응급실은 안전 사각지대
응급실 폭행은 오히려 더 늘었다. 새해가 밝았지만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며 응급의료법 개정안 국회 통과 등 법적 차원의 처벌 강화가 예고됐음에도 벌써부터 응급실 폭행 사건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모양새다.
사실 응급의료 방해 신고 건수는 한해 900건에 육박하며 응급실은 안전 사각지대로 내몰린 지 오래다.
실제 이달 초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응급실에서는 의사를 폭행한 3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대기시간이 길다는 게 난동을 피운 이유였다.
이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손을 다친 지인의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대기시간이 너무 길어 화가 나 이 같은 행동을 했다”고 진술했다.
지난 11일 경북도 예천 한 종합병원에서는 술을 마신 상태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가 “속이 쓰리고 어지럽다. 진료를 해달라”고 의사에게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폭행을 저질렀다.
같은 날 경기도 분당 한 병원 응급실에서는 감사원 국장이 난동을 부려 경찰에 신고됐다.
이 국장은 술을 먹은 상태에서 간호사를 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넘겨졌으며 자신의 직위를 내세워 의료진을 협박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앞서 자신을 치료하던 의사에게 욕설을 하며 난동을 부리다 이를 제지하던 병원 보안요원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까지 폭행한 40대 남성은 집행유예를 선고 받기도 했다.
유서 남긴 간호사 극단적 선택·병원 실습 간호조무사도 자살
연달아 터지고 있는 안타까운 소식은 간호사 자살로 이어지면서 병원계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지난 5일 서울의 한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 A씨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족들은 A씨가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인은 약물 과다투여. A씨는 당초 병동에서 일했으나 지난해 말 간호행정부서로 발령을 받고,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다가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A씨 유서에 “병원 사람들은 조문을 오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어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해 초 서울 대형병원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년 만에 또 간호사 자살 사건이 벌어지자 국민 청원 게시판 등에는 간호사가 희생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달라는 호소가 쏟아지고 있다.
간호사 태움과 의료사고, 가혹행위 등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 고질적 인력 부족난 해결을 담은 법안도 잇따랐지만 이렇다할 대책이 나오지 않자 비판은 더 거세지고 있다.
서울의료원 노조는 "고인이 근무 이동 후 간호행정부서 내부의 부정적인 분위기와 정신적 압박을 주는 부서원 행동에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며 "고인과 유가족의 억울함을 풀 진상조사와 후속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곧이어 지난 11일에는 병원에서 실습을 받고 있던 간호조무사 실습생까지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힘들다"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등지는 등 새해부터 비보가 이어지는 모습이다.
전북 익산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전북 익산 한 아파트 9층에서 B씨(28)가 떨어져 숨졌다.
경찰은 유서와 유족의 진술을 토대로 B씨가 실습했던 병원에서 동료들이 괴롭혔는지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지난 10일 조현병으로 아버지와 함께 약을 타기 위해 서울 중앙보훈병원을 방문한 환자가 2층에서 투신하는 사건까지 일어나며 위험지대로 내몰린 병원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A대학병원 관계자는 "새해부터 줄줄이 터지는 사건, 사고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을 수 없다"며 "환자의 진료권과 의료진의 안전권을 위협하는 의료기관 내 폭력은 이제 더는 용납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 건강과 더 나은 대한민국 의료환경 마련을 위해 정부·국회·의료계·시민단체 등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