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넘게 이어진 의정 갈등 속에서 교육부와 보건복지부 장관,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처음으로 마주 앉았다.
전국 의대생 수업 거부와 정원 발표 지연이 겹친 상황에서 성사된 첫 공식 대화다. 구체적인 합의는 없었지만, 정원 발표를 앞두고 열린 이 회동이 정책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정부와 의료계에 따르면,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김택우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지난 10일 서울 모처에서 비공개 회동을 가졌다.
배석자 없이 진행된 이번 만남은 약 2시간 동안 이어졌으며, 의정 수장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지난해 2월 정원 확대 발표 이후 처음이다.
이번 회동은 의협 요청으로 성사됐다. 지난 8일 의협은 공식 브리핑을 통해 정부와 국회에 "의료 정상화를 위한 논의 장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이틀 뒤 정부가 만남을 수용했다.
앞서 1월 이 부총리와 김 회장이 따로 만난 적은 있었지만, 보건복지부까지 포함된 3자 회동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무게가 크다.
의협 "모집인원 조기 확정·의개특위 중단" 요구…정부 입장 주목
의협은 회동 자리에서 내년도 의대 모집인원 3058명을 조기 확정해줄 것과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의개특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정부는 구체적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화 테이블이 공식적으로 복원된 데 의미를 두는 분위기다.
정책 방향과 관련한 정부의 최종 판단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교육부는 여전히 수업 복귀 상황을 살펴본 뒤 2026학년도 의대 정원 조정 여부를 결정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윤혜준 교육부 의대교육기반과 과장은 지난 10일 "학생들이 수업에 정상적으로 참여하는지 아직은 지켜봐야 하는 단계"라며 "학생들이 돌아와 수업이 정상화된다는 걸 전제로 (모집인원 조정을) 약속했고, 저희도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밝혔다.
정원 조정 시점도 불투명하다. 당초 정부는 4월 초 정원 조정안을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복귀율과 수업 참여율 간의 간극이 계속되면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교육부는 각 대학으로부터 학년별 수업 참여율을 취합 중이며, 정부 관계자는 다음 주말까지 발표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번 회동이 정부 판단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정부가 정책 명분을 만들기 위해 기다려온 조건이 애매해진 상황에서 의정 대화 복원이 하나의 출구전략이 될 수 있다"며 "결정의 무게를 나눌 협상 테이블이 마련된 셈"이라고 평가했다.
현장 교수 사회와 학계는 정부의 조속한 결정을 촉구하고 있다. 전북대 의대 교수회는 11일 호소문을 내고 "의정 갈등을 초래한 정책 책임자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일방적인 정책 추진을 멈춰야 한다"며 "그리고 진정성 있는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제적이나 유급 등 압박을 중단하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신뢰 회복을 위한 진정성 있는 조치와 대화의 틀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한희철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총괄부원장도 "정부가 2026년 정원을 3058명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의대생들 수업 참여율은 여전히 낮다. 아주대 신입생 109명은 지난 9일 단체성명을 통해 "수강 신청을 포기하고 수업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밝혔으며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울산대 등 주요 대학 학생 대표들도 공동성명을 통해 수업 거부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정원 조정 판단의 기준으로 여전히 ‘실질적인 수업 참여’를 고수하고 있지만, 회동 이후 정책 기류가 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화의 문은 열렸지만 정책 전환으로 이어지기까지는 갈 길이 남아 있는 가운데, 구체적인 정원 발표 시점과 방식 윤곽이 드러날 다음 주가 중요한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