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발 리스크로 촉발된 의료소모품 수급 위기가 미국과 이란의 극적인 휴전 합의로 일단 고비를 넘기는 모양새다. 석유화학 제품 기초 원료인 나프타 공급 불안이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으나, 의료 현장에서는 병원 규모에 따라 체감하는 위기 지수와 대응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상급종합병원이 연간 단위 계약과 시스템을 통해 안정세를 유지하는 반면, 개원가는 여전히 물품 확보를 위해 동료 의사들과 소모품을 빌려 쓰는 등 ‘각자도생’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번 사태는 대외 변수에 취약한 국내 의료소모품 공급망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와 함께 개선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편집자주]
대학병원, 시스템 위기 극복…최장 6개월 재고 확보
서울대 포함 빅5 병원과 상급종합병원은 이번 공급망 위기 속에서도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대형병원은 공급업체와 연간 단위 장기계약을 체결하고 있으며, 간납사를 통한 재고 관리 시스템을 갖춰 외부 충격이 현장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한 완충 지대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서울성모병원을 비롯한 주요 대학병원은 현재 최소 한 분기(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정도 버틸 수 있는 재고를 확보한 것으로 파악됐다.
인하대병원은 임원진의 선제적 판단에 따라 분쟁 장기화 시나리오를 가동, 주요 납품업체와 우선 공급 확약을 맺는 등 발 빠른 대응으로 장기전에 대비했다.
국립중앙의료원 역시 1개월 이상 재고를 확보해 진료 차질을 방지하고 있으며, 공급사 단가 인상 요구나 납기 지연을 사전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상대적으로 대형병원들은 소모품 소진에 대한 위급성이 적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원 절약을 위한 ‘내실 경영’이 한창이다.
감염관리를 위해 과거 절반만 채워도 폐기하던 의료폐기물 전용 봉투나 주사침 수거함 등을 안전 범위 내에서 최대한 채워 배출하는 등 석유화학 기반 소모품 사용 효율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중앙대병원의 경우 나프타 관련 생산업체로부터 비닐류 등에 대해 25~30% 수준 단가 인상 요청을 받았으며, 의료소모품 공급업체(MRO) 부담이 병원 견적가 인상으로 전이될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중소병원 구매력 한계 봉착…공급업체 주문 제한 ‘발동동’
대학병원에 비해 재고 확보 여력이 부족한 중소병원은 상대적으로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선제적으로 물량을 확보한 일부 종합병원은 3개월치 재고를 쌓아두며 한숨을 돌렸지만, 구매력이 낮은 병원들은 공급업체의 ‘주문 수량 제한’이라는 벽에 부딪힌 상태다.
수도권의 한 중소병원 관계자는 “기존에는 필요한 만큼 발주가 가능했으나 최근에는 일정 수량 이상 주문이 아예 차단돼 매일 재고 수량을 확인하는 실정”이라며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기본적인 진료 유지조차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
특히 나프타 수급 부족의 직격탄을 맞은 비닐 포장재나 니트릴 장갑 등 특정 품목의 공급 차질은 중소병원의 경영 압박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동사태 휴전으로 한숨 돌린 분위기이지만, 휴전 시한 종료 이후 급변할 사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개원가는 소모품 빌려 쓰는 진풍경 등 수가 ‘개편론’
개원가와 일부 소규모 중소병원 상황은 심각하다. 유통사와의 직거래 비중이 높은 개원가는 시장 변동성에 즉각적으로 노출됐다.
유통 구조상 재고 비축이 어려운 의원급 의료기관은 당장 눈앞의 물량 부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원내 조제를 시행하는 정신건강의학과나 내과에서는 약 봉투 등 비닐류 확보가 비상이다. 사재기를 막기 위한 주문 제한으로 2~3주치 물량밖에 구할 수 없게 되자, 인근 의사들끼리 소모품을 퀵 서비스로 보내주거나 빌려 쓰는 진풍경까지 벌어지고 있다.
외과 계열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일부 외과계에서는 수술용 장갑이나 봉합사, 수액세트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기존 가격의 2배 이상을 지불해야 겨우 물건을 구할 수 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혈액투석을 시행하는 의원들은 다이얼라이저와 혈액회로 등 필수 소모품 수급 불안에 직면해 있다. 현장 의사들이 정부의 사재기 단속뿐만 아니라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반영할 수 있는 수가 구조 개편 등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이유다.
주목할 점은 이번 위기가 병원 내부 운영 방식에도 변화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감염 관리를 위해 엄격히 지켜지던 소모품 폐기 기준이 ‘자원 효율화’라는 명목하에 유연해지고 있다.
대한병원협회에서 전달된 지침에 따라 각 병원들은 의료폐기물 전용 봉투나 주사침 수거함을 안전 범위 내에서 최대한 채워 배출하는 등 소모품 사용량을 줄이려는 노력을 실천하고 있다.
대학병원 등 규모가 있는 병원들은 해당 지침 준수가 가능하지만, 이미 재고가 고갈된 병원들 사이에서는 해당 지침조차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복지부, 가수요 차단 주력…“임시방편 넘어 의료 안보 체계 구축”
이러한 현장의 혼란에 대해 정부는 일단 휴전 소식을 반기면서도 병원계 협조를 구하고 나섰다.
이형훈 보건복지부 차관은 9일 열린 ‘KHC 2026’에서 미-이란 간 휴전 합의로 상황이 호전될 것으로 기대한다면서도, 여전한 불확실성을 경계하며 병원이 평상시 수준 구매를 유지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 차관은 “미국과 이란의 2주간 휴전 합의로 중동 상황이 조속히 안정되길 기대하지만 불확실성은 여전하다”며 “최근 개원의와 일부 병원이 의료용품 구매에 고충을 겪고 있는 만큼 평상시 수준을 유지하며 시장 왜곡을 방지해 주길 부탁한다”고 전했다.
이날 복지부는 의료제품 안정공급을 위한 간담회를 열고 대형병원 등의 가수요로 인한 비축 방지를 요청했다. 주사기 등 주요 용품의 생산량 자체는 충분함에도 현장 불안 심리가 사재기로 이어지는 상황을 경계한 조치다.
그럼에도 의료계 일각에서는 이번 휴전이 일시적 방편일 뿐,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시화된 시대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의료소모품 공급망을 단순한 구매 업무가 아닌 ‘의료 안보’ 관점에서 재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형 병원의 견고한 시스템을 중소병원과 개원가가 공유할 수 있는 구매 플랫폼 활성화와 원가 상승분을 적절히 반영할 수 있는 수가 연동 체계 마련이 시급한 과제로 남은 것이다.
의료계 전문가는 “향후 국제 정세 유동성에 대비해 공급망 다변화와 적정 재고 유지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병행돼야만 의료 공백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국회도 이번 사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촉구했다. 핵심 방안으로는 ▲긴급 수급대책 및 비축 계획 마련 후 국회보고 ▲국민 불안 해소를 위한 관련 정보의 투명한 공개 ▲예비비를 포함한 실질적 대응 ▲체계적이고 선제적인 대응 시스템 구축 등을 주장했다.
한지아 국민의힘 의원(보건복지위원회)은 “필수 도구가 없어 의사가 환자를 돌보지 못하는 비극은 어떤 경우에도 발생해서는 안된다”며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변명이 아니라 대비고, 회피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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