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사로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치열함이다. 책으로 보니 미국 역시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단지 우리가 조금 늦게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같은 인생을 걸어온 선배로서 후배 여의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더 이상 혼자 고민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최근 여자 전공의 사이에서 회자되는 책 한권이 있다. ‘여성의사로 살아간다는 것(Women in medicine).’
여의사의 건강실태를 비롯해 결혼과 육아, 성희롱과 성차별, 의학계 및 임상의로서의 여성 등 현안과제 모두를 총망라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미국 여의사 3명이며, 번역해 한국어판으로 옮긴 이는 바로 한국여의사회 박경아 회장(연세의대 해부학교실)
[사진]과 이유미 교수(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다.
이들은 의대 교수이자 각각 대학 4년생과 초등학교 4ㆍ6학년 자식을 둔 어머니이기도 하다.
박경아 회장은 “출판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 책을 통해 현재 여의사로서의 고민에 직면한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출산휴가-전문의 시험 자격, 논란의 핵책에도 언급됐지만 여의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문제는 결국 육아문제다. 결혼을 할지 말지까지 고민하게 되는 큰 이유이자 전공의 생활 중도포기 결정을 하는 주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출산휴가와 전문의 시험 자격을 놓고 큰 갈등이 생긴 한 여전공의가 그를 찾아왔다.
박 회장은 “아기 2명을 난 전공의가 출산휴가로 6개월을 쉰 것 때문에 전문의 시험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1년을 재수해야하는 셈”이라면서 “남편까지 찾아와 의논해왔다. 이건 아니다 싶어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총리실에까지 가서 다 얘기해봤지만 그들에게는 절박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쉽사리 해결이 나지 않았다”고 전했다.
결국 이들 부부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기에 이르렀고 곧 중재안을 얻어냈다. 시험은 치를 수 있게 하는 대신 부족한 개월 수 만큼 시험 후 보충하란 안이었다.
이 같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 여전공의들의 현실은 지금으로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다.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가 없으니 개인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없기 때문.
그는 “현재 한국여자의사회 내 한 위원회에서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계기로 쉽지 않겠지만 제도화하고자 노력 중”이라며 “끝까지 싸워 이뤄내야 하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문제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결혼과 전공의 생활 병행이 가져다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수 년 전 지방에서 있었던 3명의 여전공의 자살사건이 계기가 됐다.
박 회장은 “여의대생들은 걱정할 수준이 전혀 아니다. 하지만 일단 전공의 생활과 함께 결혼이 맞물리게 될 시기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결혼과 육아, 시댁, 남편 문제에 대한 복합적인 갈등이 지속되면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 그래서 결혼 전 미리미리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얘기”라고 피력했다.
국내 실태조사 연구 곧 시작…“정책 반영 노력”그동안 여의사들을 위한 지침서가 전무했기에 책 반응은 출간과 동시에 벌써부터 뜨겁다. 젊은 여의사들은 책 속에 나온 지침 계명을 프린트 해 책상 앞에 붙여 놓기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5년 전 알게 돼 번역 작업 후 출판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런 만큼 호응도는 빠른 것 같다. 여전공의가 많은 과에서 한꺼번에 책을 주문하기도 하고 한 대학 총장은 의대생에게 나눠주겠다며 100권을 구입해 갔다”고 전했다.
일부 의대에서 관련 내용을 강의하고 있지만 갈수록 부각되고 있는 여전공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이 남았다는 그다.
박경아 회장은 “외국에 가봐도 여의사들의 고충은 비슷하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우리보다 더욱 심각하다. 중도포기자 비율이 상당히 많다"며 “특강도 다녀왔다. 전 세계적인 문제이자 내 후배들의 문제니 더욱 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국내 여의사 실태조사 연구를 위한 준비태세가 모두 갖춰졌다는 것이다. 여성가족부의 용역을 통해 진행,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제도화 기반을 닦아나가겠다는 의지다.
그는 “1년 안으로 보고서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파장을 가져올 부분도 분명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정책적 반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다할 것”이라면서 “시간이 많아 번역 작업을 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약하게나마 후배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거듭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