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심평의학’에 이어 ‘사법의학’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 온 대한민국 의료가 ‘정치의학’이라는 역대급 소용돌이로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특히 백년대계(百年大計)인 의학교육이 정치의 한복판에 놓이면서 미래의료의 주역들이 진료현장을 등지는 상황이 장기화 되는 등 의료시스템 붕괴 우려가 커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동안 의료계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요양급여비 삭감으로 적잖은 고충을 겪어 왔다. 심평원 심사기준이 교과서 진료와 괴리가 커 ‘심평의학’이라는 냉소적 표현까지 생겨났다.
예를 들면 어깨와 무릎이 아파 병원에서 동시에 물리치료를 받더라도 한 곳만 보험을 인정한다든지, 모든 병세와 병명을 무시하고 근육주사는 한 달에 3번만 인정하는 식이다.
의사들은 불명확한 심사기준과 투명하지 않은 심사과정을 지적할 때마다 ‘심평의학’이란 표현을 사용했고, 심사기관 스스로도 관행 타파를 다짐할 정도로 의료계에서는 일반명사가 됐다.
최근에는 경향심사, 분석심사 등 심평원 스스로 ‘심평의학’ 프레임을 벗어던지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의사들에게 ‘삭감’은 여전히 불편한 단어다.
하지만 10여 년 전부터 의사들은 ‘삭감’ 보다 ‘판결’에 더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의료사고 시시비비는 물론 첨예한 직역 갈등까지 사법부 판단에 좌우되는 사례가 빈번해진 탓이다.
최근 법봉의 향배에 따라 의료계 전체가 휘청되는 상황이 잇따라 연출되면서 법원이 의료계 주요 이슈 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자리잡는 모습이다.
특히 의료사고 관련 민사소송이 주를 이루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굵직한 의료현안 최종 결정권이 법원에 주어지면서 판결에 따라 의료계가 일희일비하는 상황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의료계와 한의계가 오랜기간 신경전을 벌여온 한의사 초음파 기기 사용 여부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의사들 공분을 샀고, 파기환송심에서도 ‘무죄’ 판결이 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사법부 무소불위 영향력, 직능 업무범위도 결정
굵직한 의료 현안, 법봉 향배에 일희일비
일명 ‘사법의학’은 가뜩이나 힘겨운 대한민국 필수의료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고의성 없는 의료사고에 대한 실형 및 거액 손해배상 판결이 잇따르면서 필수의료 현장을 지키는 의사들의 부담감을 키우고 있는 실정이다.
장폐색 의심환자 수술 시기 조절과 악화 책임을 물어 외과의사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지난 2023년 8월 의학적 판단에 따라 수술을 늦춘 의사에게 금고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최종 확정했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해당 판결로 마음 놓고 수술을 할 수 있는 외과의사는 사라졌다”며 “향후 발생될 모든 파탄의 책임은 오롯이 법원에 있다”라고 힐난했다.
1년 차 레지던트 시절 대동맥박리를 진단하지 못해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기소된 응급의학과 의사가 최종심에서도 유죄를 선고 받아 면허취소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이번 판결이 우리나라 응급의료의 붕괴와 응급의료 종사자들의 이탈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과도한 배상 판결 역시 필수의료 몰락을 부치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뇌성마비 신생아 분만사고 12억원, 폐암 치료 지연 17억원, 심장수술 후 영구 발달 장애 후유증 9억원 등 거액의 배상 판결이 잇따랐다.
신생아를 바닥에 떨어뜨려 의식 불명에 빠지게 한 ‘아영이 사건’의 경우 병원 측이 부모에게 손해배상 및 위자료 명목으로 9억4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또한 응급실 내원 환자의 호흡상태가 위험하다고 판단해 기관삽관을 시도한 의료진에 대해서도 5억7000만원의 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모두 의사 및 의료기관에게 뼈아픈 판결이다.
정치 중심 놓인 ‘한국 의료’
‘처단’ 대상 지목, 봉합되지 않은 상처
더 큰 문제는 정치권에서 의료가 핵심 의제가 되는 상황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의사들이 국회에 입성해 정치 행보를 걷거나 입법이나 제도에 반발해 갈등구도를 형성하는 경우는 왕왕 있었지만 지금처럼 정치의 한복판에 놓인 적은 없었다.
실제 지난해 의과대학 증원으로 촉발된 의료대란 사태는 정치권의 최대 쟁점이었다. 미래세대인 젊은의사들이 진료현장을 떠났다.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우려했던 의사 배출 절벽도 가시화 됐다. 의대생, 전공의, 군의관, 공보의, 전임의 등 각종 시험과 전형에 응시자가 급감하면서 의료체계 붕괴 우려를 키웠다.
그럼에도 정부는 아무런 입장 변화 없이 ‘의료개혁’의 필요성만 되풀이 했다.
급기야 여당 주도로 정치권과 정부, 의료계가 참여하는 여의정 협의체를 출범하고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지만 정부의 요지부동 탓에 한 달도 가동되지 못하고 중단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의사인력 수급 관리는 의료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정부의 책무”라며 의료개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의정 간 고착 상태가 이어지던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갑작스런 비상계엄은 의료계 정치판의 중심에 있음을 다시금 방증시켰다.
비상계엄 직후 발표된 포고령에 ‘전공의를 비롯해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복귀하고 위반시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비상계엄은 국회의 신속한 저지로 6시간 만에 해제됐고, 이후 엄청난 후폭풍이 불면서 윤석열 대통령은 고립 상태에 놓였다.
사실상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불가한 상황에서 그동안 추진하던 다양한 의료개혁들도 덩달아 동력을 잃을 공산이 커지게 됐다.
한 의료계 원로는 “정치의학이 국민 건강과 생명을 지키고 있던 의료인들이 진료현장을 등지게 했다”며 “의학교육과 의사양성은 결코 정치논리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일침했다.
이어 “더이상 의료가 정치에 휘둘리는 비극이 없길 바란다”며 “제도 변화가 필요하면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최선의 방안을 도출하려는 대화와 타협이 수반돼야 한다”고 덧붙였다.